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예견된 참사’, ‘안이한 대처’, ‘책임자 처벌’, ‘정쟁’-. 대형사고가 터지면 늘 일어나는 우리사회의 대응 패턴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사고 수습도 끝나기 전에 언론과 정치권의 마녀사냥 식 희생양 찾기가 시작됐다. 국정조사 요구, 정권 퇴진 촛불집회 등 정쟁도 벌어지고 있다.

언론과 야당의 책임 추궁은 일견 일리가 있다. 정부는 국민안전에 무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태원에 경찰을 다수 배치, 사고에 대비하지 않고 112신고 접수 후의 대응도 안이해 비난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사후약방문 격이다. 압사사고가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과 같은 좁은 골목길에서의 참사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찰이나 지자체, 언론, 정치권, 국민 등 우리 사회 누구도 이런 골목길 압사사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매뉴얼도 없고 대응도 안이할 수밖에-.

이번 참사는 인파 밀집에 따른 사고 예방 매뉴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정부나 국민, 사회단체 등 우리 모두의 민낯이 반영된 것이다. 연일 공세를 펴는 민주당도 집권 시절 이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을 준비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이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정치공세일 뿐이다. 야당은 인파가 몰리는 경우 일어날 참사 가능성에 어떤 경고도, 대비책 요구도 하지 않았다. 예견된 사고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도 핼러윈 행사 소식만 전했을 뿐이다. 당국의 대응태세를 점검,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참사를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부라고 다를까?

외국은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까? 사고 수습이 먼저다. 그리고 원인을 규명한 뒤 재발 방지에 총력을 경주한다. 책임자 처벌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사망자 2977명에 부상자 2만5000여 명, 천문학적 경제적 손실을 본 9·11테러 당시 미국은 그렇게 했다. 우선 관계자부터 처벌하고, 정쟁을 벌이다 흐지부지되는 우리네와 대응방식이 달랐다.

미국의 9·11테러와 대응을 복기해보자.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맨해튼 월드트레이드 쌍둥이 건물 북쪽 빌딩에 1차로 납치 비행기에 의한 충돌테러가 발생했다. 17분 뒤 오전 9시 3분 남쪽 빌딩에 2차로, 51분 후 오전 9시 37분에는 워싱턴DC 펜타곤 건물에 3차로 납치 비행기에 의한 충돌테러가 일어났다. 77분후 10시 3분에는 네 번째 납치 항공기가 기내 승객의 저항으로 테러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1차부터 4차까지 77분이 경과했지만 미 항공 관제소는 물론 공군도 납치 비행기 4대의 소재나, 목적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비행기 납치 테러에 가담한 19명의 테러범은 ‘카터’칼이라는 무기도 아닌 무기로 조종사를 위협, 비행기를 장악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항공 보안이자 관제 시스템이었다. 우리 같으면 공항, 공군 관계자가 처벌을 받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그런 테러를 상상도 못 했고, 대응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방관 340명의 희생도 우리 같으면 소방 지휘부의 판단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소방 지휘부가 빌딩이 곧 붕괴될 위험이 있는데도 빌딩 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들을 진입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빌딩이 무너져 모두 희생됐다. 그러나 누구도 문책을 받지 않았다. 소방관들은 건물 안 사람을 구하기 위해 투입되는 게 상식이고 당연한 일을 하다 순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보기관이 잘 대처했다면 9·11테러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 CIA는 당시 테러 관련 주동자에 대한 많은 첩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FBI나 이민국, 세관 등 관계기관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테러범들은 미국에 들어와 조종훈련을 받으며 테러 모의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되면 CIA, FBI 책임자는 목이 날아가도 몇 개 날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계기관 간 정보교류 매뉴얼 미비 등 구조적으로 제도에 문제가 있었던 탓이다.

당시 미국 언론이나 야당도 사고 원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책임자 문책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테러 발생 후 현장수습, 부상자 치료, 원인 규명, 재발 방지에 힘을 쏟았다. 여야 동수로 구성된 의회청문회도 오랜 기간 이에 집중했다. 미 의회는 테러 발생 1년 후 2002년 11월 22일 테러 방지를 위한 정부의 컨트롤 타워인 국토안보부를 신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신설된 국토안보부에 연방 재난관리국, 해안경비대, 국경경비대, 경호, 이민국, 세관 등을 두고 테러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지도록 했다. 현재의 항공 보안검색 등 매뉴얼 제정, 테러 방지를 위한 정보기관 간 협조 구축 등 제도적 정비가 이때 이뤄졌다.

미국의 대응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태원 참사를 예견하지 못한 정부를 질타만 하는 것 역시 능사가 아니다. 안전 매뉴얼 부족이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일어난 참사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마련에 우선점을 둬야 한다. ‘매뉴얼이 없는,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선진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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