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코로나19 위기 전, 대기업 고참 부장을 대상으로 Z세대의 이해와 소통을 주제로 한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신세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줄 입사 1~3년 차 신입사원이 초대되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는 회사를 향한 소속감, 몰입의 대상, 보상을 둘러싼 생각, 이직에 대한 의향 등에서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특별히 워라밸을 두고 보다 미묘하면서도 첨예한 갈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기성세대인 여성 부장이 질문을 던졌다. “라떼(?)는 워크가 라이프고 라이프가 워크였는데, 너희 신세대가 주장하는 워라밸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말이다. 당시 그 질문을 접했던 신세대 얼굴에는 하나같이 ‘현타’(현실자각타임)를 실감한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는 동작을 선보인 신세대도 있었다.

바로 그때 입사 1년 6개월 차 신세대가 멋진 답을 내놓았다. “우리 세대는 워크를 잘하기 위해 라이프가 필요합니다!” 우문현답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라이프의 내용은 개인별로 천차만별이기에, 누군가에게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성장을 위한 투자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취미활동일 수도 있고 종교 생활일 수도 있다는 부연설명이 뒤를 이었다.

실제 워라밸을 주제로 한 조사 중 ‘일과 라이프 중에서 나의 인생을 가치있게 하는 것을 선택하자면 라이프다.’라는 설문 항목에 기성세대는 54%가 찬성을 표한 반면, 신세대는 무려 80%가 찬성을 보냈다. ‘일 때문에 개인 생활(휴가 여가 등)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항목에 대해서도 기성세대는 39%만이 찬성한 반면 신세대는 66%가 지지를 보냈다. 현장에서 워라밸을 사이에 두고 세대 간 인식 차이가 갈등으로 점화될 가능성이 잠재함을 추론케 한다.

워라밸이란 국제노동기구(ILO) 정의에 따르면 품격있는 일(decent work)에 종사하기, 좋은 부모가 되고 건강한 가족을 꾸리기, 그리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투자하기, 이 세 가지 삶의 요소 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워라밸 개념은 1970년대 초 영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1986년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워라밸이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신세대 인재들의 직장 선택 기준으로 1순위 연봉 다음에 워라밸이 2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봉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워라밸을 선택하겠다는 응답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신세대가 중시하는 워라밸에 대한 우리네 기업의 이해도가 지극히 단순하다는 데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여전히 일/업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워라밸을 중시하는 신세대는 칼퇴근을 선호하되 야근은 싫어하고, 회식도 기피하기 일쑤요, 주말 근무는 더욱 손사래 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주를 이룬다. 신세대는 자신들을 향한 편견이나 부정적 인식을 일종의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 신세대도 업무의 중요성 및 시급성이 이해되고 설득되면 기꺼이 주말을 반납할 의지가 있음은 물론, 누구나 필히 참석해야 한다는 강제성이나 음주 및 건배사를 강요하는 분위기만 아니라면, 선배들로부터 업무상 필요한 꿀팁도 얻고 네트워킹도 확대할 수 있는 회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워라밸은 일과 가족과 자신에 대해 항상 3분의 1씩 골고루 투자하라는 의미도 아니요,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하나(one size fits all)의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생애주기에 따라 워라밸 전략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1990년대생 Z세대라면 1순위가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 투자하기요 2순위가 일을 통해 잠재력 및 역량을 키우기라면, 3순위는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일 것이다. 1980년대생 M세대라면 관리자로서 자신의 리더십 역량을 발휘하기가 1순위요, 좋은 부모가 되고 건강한 가족을 꾸리는 일이 2순위가 될 것이요, 자신을 위한 투자가 3순위에 놓일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은 구성원의 워라밸 지원을 위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참신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도입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컴퓨터 솔루션 기업 사스(SAS)는 직장 내 데이케어를 운영하면서 교사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고, 부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 변호사까지 직접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신세대 4명 중 3명은 ‘회사가 잘 되더라도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구글 및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개인 성장을 뒷받침해주는 피드백을 일상화하고, 교육, 코칭, 상담 등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워라밸 같은 국적 불명의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안타깝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워라밸을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 전략이나 프로그램 또한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음이 못지않게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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