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임철순 주필
임철순 주필

나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4년 10월에, ‘주례는 서글퍼’라는 글에서 “한 달 전에 약속한 12월 예식까지만 맡고 주례업계에서 이만 은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05년 데뷔 이래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스무 번쯤 되나?) 혁혁한 출연 실적을 쌓았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그 뒤 몇몇 친구들의 간곡한 요청을 더 간곡하게 고사/사절하며 이 약속을 스스로 잘 지켜왔다.

그런데 넉 달도 더 전에 고교 동창 하나가 아들을 장가보낸다며 주례를 부탁해왔다. 8년 전에 쓴 글을 보여주고, 다른 동창들도 다 못해주었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친구들 들먹이지 마라, 이미 사돈될 집에 네가 주례한다고 말해놓았다, 어차피 결혼식에 올 건데 주례까지 하면 좀 좋으냐, 주례는 서글픈 게 아니라 보시하는 거다" 운운 하면서 막무가내였다. 석 달 가까이 밀고 당기다가 결국은 내가 졌다.

예식 한 달을 앞두고 만나본 신랑신부는 보기 좋고 이뻤다. 특이하게도 신부의 이름이 ‘미모’였고, 신랑은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은 것 같았다. 셋이서 빨간 뚜껑 소주 한 병씩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1년 중 가장 좋은 달 10월, 그중에서도 한복판인 16일에 나는 다시 주례 무대에 섰다. 오랜만의 조명이 눈부시고 부담스러웠다. 아래는 그날 내가 ‘주례사’로 떠든 내용이다.

신부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얼마나 예쁘기에 이름이 미모일까. 그러나 ‘미’는 아름다울 미(美) 자가 맞는데 ‘모’는 모습 모(貌)가 아니라 꾀할 모(謀) 자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에 더 많이 알려진 권모술수라고 할 때의 그 ‘모’입니다. 한자는 이렇게 다르지만 오늘의 신부는 충분히 미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謀 자에 고려하다, 계획하다, 모색하다, 상의하다, 자세히 살펴보다, 이런 여러 가지 좋은 뜻이 있는 점입니다. 글자가 알려주는 대로 두 사람은 진지하게 모색하고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글자의 뜻과 개념에 맞게 모든 일을 서로 충분히 상의하고 자세히 살펴 슬기롭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엔 난관과 장애가 참 많습니다. 긴 호흡으로 사랑을 아끼면서 함께 걸어가십시오. 그러려면 먼저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하고, 서로 다른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말처럼 남녀는 근본적으로 많이 다릅니다. 남자는 설명을 해주면 화가 풀리지만 여자는 화가 풀려야 설명을 듣습니다.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들에 비해 멍청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하는 짓이 하도 답답해 속이 터진 여자가 “이 세상 남자들은 뇌 하나를 갖고 돌려 쓰는 것 같다”고 쏘아붙였습니다. 남자가 그 말을 멋지게 받아치려고 했으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자기가 뇌를 쓰는 날이 아니더랍니다.

혹시 나중에, 나중에 미모 씨가 무슨 일로 막 퍼붓거든 신랑은 참고 참다가 아무래도 할 말이 없으면 “이쁘면 다냐? 미모면 다야?”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미모 씨가 ‘아 참, 내가 이쁘지’ 그러면서 화를 풀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배우자의 실수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배우자의 실수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아무러면 당신과 결혼한 실수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래와 같은 말로 나는 주례사를 마무리했다.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에는 주인공 어니스트를 가리켜 "이 겸손한 사람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나날이 더 좋아졌다"는 아주 멋진 말이 나옵니다. 그 표현을 빌려 이들 부부가 결혼생활을 해나감으로써 세상은 날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며 주례의 말씀을 마칩니다. ​

여기저기서, 주로 인터넷에서 주워 읽은 우스갯소리를 짜깁기하고 베껴서 쓴 글이다. 특히, ‘큰 바위 얼굴’ 이야기는 그동안 주례사에서 여러 번 우려먹은 내용이어서 스스로 좀 겸연쩍었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있겠는가. 내 머리에서 더 좋은 말이 나오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결혼식 다음 날,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이 “항상 주례 말씀 마음에 새기고 살겠다”고 카톡인사를 보내왔다. 내가 또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렇게 답장을 띄웠다. “일생에 다시 없는 좋은 시절이니 행복과 즐거움을 가득 담고 안고 품고 이고 지고 메고 매고 싣고 걸고 달고 쓰고 심고 신고 입고 꽂고 잡고 타고 배고 돌아오세요.” 숨가쁘게 이걸 쓰면서 사람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나도 새삼 놀랐다. 마지막 부분에 ‘배고’를 쓸 때 조금 망설이긴 했다(이건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라는 이야기잖아?). 신랑은 내 카톡에 질려버렸는지 ‘좋아요’ 하트 표시만 날리는 걸로 답장을 대신했다.

이 시대에 결혼을 하는 건 진정한 효도요, 아이를 낳는 건 훌륭한 애국이다. 결혼은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10월에 결혼식에 갈 때마다 나는 또 그놈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축가를 들을까봐 신경을 쓰곤 하는데(이 뻔하고 뻔뻔한 노래 정말 싫다), 이번엔 그런 게 없었던 것도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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