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국가'로 가는 길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지난 보름 동안에도 TV를 켤 때마다 참 지긋지긋했지요? 하지만 그런 일들은 먼저 말씀드린 대로 ‘마음속의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두시고, 예고한 대로 ‘세계 일등 국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할 일이 뭔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저는 이런 미래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떤 선배가 교내 웅변대회에서 ‘대망의 80년대’가 되면 집집마다 자가용 한 대씩을 갖게 될 것이라고 외치던 일이 떠오릅니다. 박수를 쳤지만 믿지 않았지요.

그런데, 정말 1980년대 말부터 자가용 대수가 늘어나고 지난해 말 통계에 의하면 자동차 누적 등록 대수가 약 2491만 대로 국민 두 명에 한 대씩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70년 전 세계에서 꼴찌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10대 경제대국 안으로 들어서고,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그동안 정치보다는 국민이 바르게 판단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이고, 그렇게 만든 것은 뜨거운 교육열 덕분이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더 잘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9년 12월 26일 교육부 발표에 의하면 OECD 38개국의 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성인(25∼64세)이 39%인데 우리나라는 50%이고,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뒤를 이어 5위라는 겁니다. 특히 청년층(25~34세)의 교육 상태는 OECD 평균이 45%인데 우리는 69.8%로 아일랜드 다음 2위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대외의 인정 정도도 아주 긍정적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엊그제 한글날 방송에 의하면 16년 전 세종학당 한국어 수강생이 7146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26만 4800여 명으로 37배나 늘어났고, 유럽을 비롯해 인구 13억의 인도, 이제까지 우리와 거리를 둬왔던 러시아까지 포함해 전 세계 62개국 750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채택하고, 인구 1억 명의 베트남에서는 제1외국어로 채택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육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력이 강하다고 일등 국가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나라가 되려면 세계 국민들이 모두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여줘야 합니다. 그런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려면 너무 추상적이니, 제가 2004년과 2017년에 독일에 머물면서 유럽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겪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독일에 머물면서 유럽을 여행한 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평생 연구과제로 삼아온 동·서양 시학(詩學)을 통합해 새로운 시학을 만들어보려고 교환교수 자리를 찾다가 지리적으로 독일이 유럽 사회의 중심지역이고, 독일과 영국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시론이 서구 문학을 주도해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독일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세계 1, 2차 대전을 주도하고, 2차 대전 때 아침저녁으로 만나던 이웃 유대인들을 고발해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3만 1531명을 질식사시키고, 그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저히 가까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한 열흘쯤 지나면서 제 마음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겁니다. 만날 때마다 이웃집 할머니가 “하이” 하고 인사를 하고, 버스나 트램은 예정 시간 1분 안에 도착하고, 사람이 길을 건너면 멈춰서고, 손님이 착석해야 출발하고, 시속 200km 아우토반에서도 깜빡이를 켜면 차선을 양보하고, 사고가 날 지경이 아니면 클랙슨을 누르는 법이 없고, 백화점과 주유소에서 두 번이나 지갑을 잃어버렸는데도 모두 그대로 찾고….

그런 저를 ‘광팬’으로 만들기 시작한 건 뮌헨 시내에 있는 대형 생맥주집 호프브로이어를 갔을 땝니다. 5, 600명도 넘는 손님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데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것처럼 소곤대는 소리만 들리는 겁니다. 그러다가도 간혹 한 사람이 잔을 들고 무대로 올라가 “트링크, 트링크” 하고 외치고, 무대 아래 사람들도 따라 외치다가 연호가 끝나면 아주 조용해지는 겁니다.

저를 아주 광팬으로 만든 건 한 달 뒤쯤 한국식당에서 한잔하고 돌아올 땝니다. 유럽 대륙의 도시들은 한복판에 성당을 세우고, 그 앞에 광장과 상가를 만들고, 주택과 도로가 타원형으로 둘러싸는 ‘타운(town)형’이라서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밤 9시만 지나면 가족들과 함께하는 문화라서 길을 잃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동·서양 문화 차의 원인을 생각하며 걷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잠시 몇 블록을 헤맸지요. 다행히도 저편에서 밤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고 노인이 오데요. 주소를 대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 할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려 좌로 몇백 미터, 우로 몇백 미터를 가라고 가르쳐주다가 안심이 안 되는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얼마 가니까 아는 길이 나오데요.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봐야 안심하겠다며, 서툰 영어로 당시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된 북한 ‘신의주 인근 용천역 폭발사고’를 “노스 코리아 범(bum), 범!” 하다가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왜 1, 2차 대전의 전승국인 프랑스나 영국 대신 여러분께 독일을 먼저 소개하는지 짐작하시겠지요? 저는 묵던 집 뒤 할머니와 어두운 밤길의 할아버지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옆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는 독일의 술꾼들과, 깜빡이를 켜면 양보해주는 고속도로 기사들과, 사람이 지나가면 저만치서 멈추는 버스 운전사들 덕에 독일이 다시 일어나고 세계인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우리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소개하는 겁니다.

유럽인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호프브로이어를 경험하고 한 열흘 뒤 부활절 여행단에 끼어 이탈리아를 여행할 땝니다. 스위스를 거쳐 이틀인가 사흘 만에 도착한 로마 호텔은 우리들의 숙소와 식당을 유럽 여행객들과 다른 층에 배정해주더군요.

처음엔 우리끼리 편히 쉬게 배려해준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했지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모닝커피를 마시려고 하니까 차디차고, 티스푼도 없는 겁니다. 웨이터에게 커피를 바꾸고, 티스푼을 가져오라고 했지요.

그러자 놈은 턱으로 수프 스푼을 가리키며 찬 커피를 그냥 마시라는 겁니다. 동행한 교민들은 그냥 마셨지만, ‘옐로 니그로’라고 깔본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가이드에게 지배인을 부르라고 한 다음, 내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그대로 통역하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탈리아가 유럽의 문화대국이라고 알고 여행을 왔다.” 지배인은 바쁜 사람을 불러다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식으로 미소를 짓더군요. “그런데, 로마 식 커피 마시는 법은 차가운 커피에 수프 스푼으로 마시는 거냐? 귀국해서 우리 언론과 인터넷에 소개하려 하니 상호와 전화번호가 적인 명함을 달라” 하고 제 명함을 줬지요.

그 인간은 제 명함에서 대학교수, 한국문학도서관 ‘프레지던트(president)’라는 인적 사항을 봤는지 종업원에게 뭐라고 쏼라거리며 커피와 티스푼을 바꾸라고 하고 사죄를 하더군요. 그 순간, 2차대전 동맹국인 독일이 더 번성하는 나라가 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데요.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나라일수록 폭망한 까닭을 알게 해준 나라는 2017년에 간 그리스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서 시학의 대비적 연구를 마무리 지으려면 서구 시학의 발상지를 가봐야 하는데 첫 번째 나왔을 때 여비 때문에 못 가본 나라였기에 3년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하자마자 갔지요.

첫 번째 사고는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택시 속에서 터졌어요. 택시비를 주려고 지갑을 꺼내다가 휴대폰을 놓고 내린 겁니다. 저는 저만큼 달려가는 택시를 따라가며 손짓을 하고, 집사람과 큰딸은 “헬로, 헬로”하고 불렀지요.

그러나 쏜살같이 골목으로 사라지더군요. 팁도 넉넉히 주었고, 운전석 옆에 놓고 내렸으니까 곧 발견할 테고, 우리가 적어준 주소를 보고 운전해 왔으니까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헛수고더군요.

두 번째 사고는 이튿날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 속에서 터졌습니다. 집사람과 딸내미를 태우고 뒤따라 타서 식구들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앞에 선 젊은이들이 이야기에 팔렸는지 비켜주지 않는 겁니다.

이어서 전철이 출발하고, 체중이 한쪽으로 쏠리는데 뒤에 선 젊은이가 밀데요.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앞쪽에 앉은 손님이 제 호주머니를 가리키며 웃더군요. 만져봤지요. 지갑이 없데요. 한 30유로쯤 들었을라나, 그때 1유로가 1300원이 채 안 되던 시절이니까 3만 7, 8000 원쯤 잃어버린 겁니다.

세 번째 사고는 ‘세계의 배꼽’이라는 델포이 신전을 갔을 때 터졌습니다. 신전을 구경하고 나니 3시가 가까워졌습니다. 딸내미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맛집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스그 식당은 점심 장사가 끝나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중이었습니다. 머뭇거리자 들어오라고 하데요. 그런데 집사람 스테이크가 먹다 남은 것인지 굳어 있는 겁니다.

이 인간들도 우리를 옐로 니그로 취급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꿔달라고 하라고 눈짓을 했지요. 그러자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던 종업원이 맨손으로 집어가는 겁니다. 딸아이가 계산하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주인이라는 인간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음식 값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냥 받으라고 권했지만 고집을 부려 지하철에서 날치기당한 돈에 20유로쯤 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딸내미 옆구리를 찔러 밖으로 나오면서 히죽이 웃었지요.

유럽 대륙 쪽에 그래도 괜찮은 나라를 하나만 더 꼽으라면 저는 스페인을 꼽고 싶습니다. 2004년 말 여행을 할 때 대서양 바닷가의 자그마한 모텔의 프런트 영감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환영한다며 체리주 한 잔과 훈제 돼지고기 하몽 한 점을 주데요. 그런데, 그 체리주가 달콤 쌉쌀한 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딸내미와 마누라도 맛보게 하고 싶어 한 병만 팔라고 했지요.

그러자 집에서 담근 술이라서 팔 수 없다며 그냥 두 잔을 더 주겠다는 겁니다. 그 순간 우리나라 관광지 모텔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면서 프랑스보다 앞자리에 끼워 넣었지요.

지금은 우리나라도 독일이나 프랑스 또는 스페인만큼 잘삽니다. 아니, 어쩌면 더 잘살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독일 버스 정류장을 이야기했지만, 여름에는 햇살을 가리라고 우산 모양의 차광막을 설치하고, 에어컨까지 틀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1등 국가가 되려면, 국민 모두가 ‘내’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고, 우리 것에 서구의 좋은 점을 합치는 방법을 택해야 될 겁니다.

자아, 그럼 다음 주제를 말씀드리고 물러날게요.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늙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게 살다가 죽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함께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안녕, 안녕, 10월 27일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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