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근래 언론에 영국 소식이 잦았다.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의 선봉에 서며 2019년에 총리가 되었으나 여러 구설수에 시달리던 보리스 존슨의 사임,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에 이어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락했다. 미 달러화의 강세로 우리나라의 원화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으니 별일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원화의 환율이 달러당 1400원을 넘으며 걱정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파운드화의 급락은 영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한 경우라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브렉시트 망령 속에 파운드화는 요동치고

먼저 긴 흐름에서 환율 추이를 살펴보자. 20여 년 전인 2000년을 기점으로 달러에 대한 한국 원화, 영국의 파운드화, 그리고 유로화 환율을 비교해보면 최근 환율 수준이 얼마나 특이한가를 알 수 있다. 원/달러 환율은 등락이 있었으나 대체로 1200원 수준이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2009년 초 1450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최근 원/달러 환율 수준은 지난 20년간 우리가 보았던 것이다. 작금의 높은 환율이 물가불안 요인이 되고 있어 금리 인상과 같은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유로화의 경우 1999년 초 출범 당시 유로당 1.1달러 정도였으나, 이어진 2년 동안 가치가 하락하며 1달러를 하회했다. 그 후부터 올 초까지 1.1~1.4달러 수준에서 등락을 거듭했다. 최근 1유로가 1달러를 하회하는 것은 과거에 비추어 전대미문의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영국 파운드화의 경우 최근의 달러화 대비 환율 저점(파운드당 1.07달러)은 지난 20년간 보지 못했던 낮은 수준이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까지 파운드화 환율의 최저점은 파운드당 1.4달러 정도였다. 최근의 저점은 장기적 관점에서 보아도 낮다.

브렉시트가 파운드화 약세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쳐온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EU 탈퇴는 유럽 경제에도 악재였다. 따라서 독일, 프랑스 등 대륙 주요국이 사용하는 유로화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었던 2016년 초부터 2022년 9월 말까지 두 통화의 달러화 환율 움직임을 보면 파운드가 약 27%, 유로화는 11.5% 하락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우크라이나 전쟁 등은 이 기간 영국과 유럽 국가들에 공통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영국 파운드화의 하락 폭이 유난히 더 큰 것은 영국 고유의 정치, 경제 사정이 통화 가치 하락의 요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최근 파운드 환율 하락의 발단은 9월 말에 출범한 트러스 총리의 새 정부가 서둘러 발표한 경제 정책이었다. 영국도 팬데믹과 이어지는 인플레이션,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어진 에너지 가격 급등과 같은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끊자 에너지 가격이 크게 오르며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 일반 가정의 전기·가스비 부담이 급등하자 유럽 각국 정부는 부담 완화를 위한 비상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갓 출발한 트러스정부 감세정책도 안 먹혀

취임 직후인 지난달 23일 트러스 정부는 가계 에너지 요금 지원 방안과 더불어 5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감세 정책을 내놓았다. 핵심은 법인세 인상 철회, 고소득자 세율 인하 등 향후 5년간 450억 파운드(약 70조 원) 감세 구상이다. 시장과 전문가들의 반응은 “이게 리얼?”이었다. 파운드화 환율이 급락했고 장기 금리가 크게 올랐다. 대규모 감세가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규모 확대로 이어질 것이기에 국채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보유한 국채를 투매(投賣)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영국의 중앙은행이 대규모 국채 매입 계획을 발표하며 일단 급한 불을 껐다.

감세를 통한 경제 활성화는 40년 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총리 시절 득세했던 정책이다. 기업이나 개인이 세후 소득이 높아지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발상에 근거한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따르면 감세로 경제가 활성화하면 낙수효과(trickle down)로 온기가 저소득 계층까지 퍼질 뿐 아니라 정부 세수도 늘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런 이론적인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시도되었던 유사 정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검토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이런 발상은 이제 철 지난 유행가 처지이다. 오죽하면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즉각적으로 감세방안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재고가 바람직하다는 반응을 보였을까.

정치인들의 신념이 무리한 선택의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트러스 정부의 대처 정책 소환은 궁여지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호기롭게 브렉시트를 밀어붙인 후 임기 내 EU와 결별을 마무리하겠다던 존슨 총리의 큰소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아직도 EU와 갈등을 빚고 있고 브렉시트의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작용만 보이는 형국이다. 자중지란이던 야당이 전열을 정비하는 등 각종 악재가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당 정부가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는 것 같은 인상이 짙어 추이를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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