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남녀가 찾아낸 그들만의 놀이터

지난 4월 재개장한 양천구 목동 파리공원에 마련된 바둑판 테이블. 그러나 시니어들은 이곳보다 '살롱드파리' 건물 안에 바둑판을 설치해 이용하고 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지난 4월 재개장한 양천구 목동 파리공원에 마련된 바둑판 테이블. 그러나 시니어들은 이곳보다 '살롱드파리' 건물 안에 바둑판을 설치해 이용하고 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요즘은 남녀 구분 없이 뭐든 도전하고 함께하는 시대다. 시니어가 즐기는 취미 중 특히 당구는 여성 선호도가 높아져 60대 이상 동호회 안에서 여성 참여 비율이 꽤 높아졌다. 실력만 되면 남녀 구분 없이 경기하면서 어울린다. 그런데 유독 시니어 세대가 심취하는 놀이 가운데 깨지지 않는 금남, 금녀의 영역이 있다. 남자는 바둑, 여자는 뜨개질이다. 어딜 가도 이성이 한두 명쯤 섞여 있다고 하지만 남고에 여교사, 여고에 남교사가 있는 수준. 바둑 두는 남자와 뜨개질하는 여자, 그들의 아지트에 잠시 들어가 볼까?

'살롱드파리'에서 우아하게 바둑을 즐긴다?
지난 4월 재개장한 목동 파리공원에는 좀 특이한 시설물이 있다. 공원 속 테이블과 벤치에 바둑판이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시설물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어서다. 바로 ‘살롱드파리’. 어르신들은 이곳에 설치된 테이블 4개에 자신들의 바둑판을 설치해 놓고 아침 개장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바둑을 둔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깥에서도 여유 있게 바둑을 즐긴다. 고정 인원만 20여 명 정도이고 한편에서는 장기를 두는 이도 눈에 보였다.

파리공원이 리모델링하면서 전시 등 주민 소통 공간으로 새롭게 지은 '살롱드파리'의 내부. 이곳에서 거의 매일 바둑에 몰두하고 있는 시니어 남성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파리공원이 리모델링하면서 전시 등 주민 소통 공간으로 새롭게 지은 '살롱드파리'의 내부. 이곳에서 거의 매일 바둑에 몰두하고 있는 시니어 남성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어르신 입장에서 ‘살롱드파리’가 그들만을 위한 곳이면 좋았으련만 원래는 아니다. 건물이 세워지기 전, 그 자리에 있던 정자에서 바둑을 두던 공원 이용자들이 찾아와 자리 잡았다. 코로나로 밖에 나갈 수 없고, 공원 공사를 한다고 하니 또 한참 발목이 묶여 있다가 4월 23일 재개장에 맞춰 바둑판과 바둑알을 들고 나와 일종의 영역 표시를 해둔 셈이다.

살롱드파리를 운영하는 위탁업체 관계자는 “개인 물건은 부착하지 못 하는데 어떤 분께서 부착하셨다”며 “매일같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신다”고 했다. 또한 “살롱드파리 내 바둑판을 보고 가끔 바둑알을 찾는 이용객이 있어 바둑 세트 하나 정도 갖춰 놓았다”고 설명했다. 
안타까운 일이 생길 때도 있다. 1층짜리 건물로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주민 대상 프로그램이 있을 때면 어르신들은 바둑을 멈춰야 한다. 본인들이 직접 만든 놀이터라는 인식이 있어서 나가달라고 할 때가 가장 난감하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오래전부터 이들이 놀이터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공원을 관리하는 양천구청 공원녹지과도 어르신들의 편의를 위해 살짝 눈감아 주고 있다. 이곳 터줏대감 조영복(77) 씨 말에 의하면 리모델링 초기 구청 관계자와 파리공원 리모델링 설계를 담당한 교수가 와서 어른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장소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곳곳에 바둑판이 새겨진 테이블을 놓아뒀다. 
조 씨는 “구청에서 만들어준 벤치는 등받이도 없고, 미끌미끌해 노인들이 넘어질 수 있다”며 “개인 물품을 가져다 놓았고, 구청에서 담당자가 와서 도와준 덕분에 8명이 앉아서 바둑을 둘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날씨가 좋아 건물 바깥에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 왼쪽이 조영복 씨. 벤치 위를 보면 바둑판을 새겨넣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나무 바둑판을 갖고 와 이용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날씨가 좋아 건물 바깥에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 왼쪽이 조영복 씨. 벤치 위를 보면 바둑판을 새겨넣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나무 바둑판을 갖고 와 이용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바둑을 매일 두는 이유에 대해 조 씨에게 물으니 “노인네들 시간 때우기 참 좋다”며 웃는다. “집 안에 있는 것은 답답하고, 큰 힘 들이지 않고 잡생각 없이 집중하는 데 바둑만 한 게 없다”고 말한다. 또한 “집에 있으면 강아지보다 후순위로 밀려나니 최대한 나의 시간을 밖에서 쓰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가장 서운할 때가 ‘살롱드파리’가 문을 닫는 월요일과 공휴일이다. 매일 나와 있고 싶은데 그게 아쉽다고. 
그럼에도 카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에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바둑 두는 모습이 신선하다고나 할까?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서울 종로 낙원상가 주변 락희거리 일대와 종묘 앞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남자 시니어들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밝은 공간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듯 바둑에 심취한 모습이 나름 멋스럽게 느껴졌다. 

코로나 직전 실버영화관(구 허리우드 극장)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찍은 낙원상가 뒷골목. 이곳에서도 바둑 두는 시니어를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코로나 직전 실버영화관(구 허리우드 극장)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찍은 낙원상가 뒷골목. 이곳에서도 바둑 두는 시니어를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알록달록 솜씨가 살아나는 뜨개방
뜨개방은 남자가 들르기 힘든 곳이다. 시장이나 동네 구석구석, 뜨개방에 가보면 협소한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서 뜨개질 삼매경이다. 

 뜨개질할 때 사용하는 대바늘. 두께와 길이가 각양각색이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뜨개질할 때 사용하는 대바늘. 두께와 길이가 각양각색이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핸드메이드(수공예)가 주목받고 있다. 레트로(복고풍)의 인기로 인해 대바늘이나 코바늘 뜨개 등을 알려주는 유튜브의 인기도 부쩍 높아졌다. 가방, 모자, 목도리, 조끼 등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사용하고, 정성이 담긴 선물을 할 생각에 시도하는 이들도 꽤 있다. 뜨개질 방법을 조금이라도 알고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면 유튜브를 통해 배울 수도 있지만, 좀 더 올바르게 배우고 재미를 붙이기 위해 뜨개방을 찾는다. 
한 뜨개방에서 만난 장OO(52) 씨는 20년 만에 다시 코바늘 뜨개를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 직후 처음으로 직접 실을 떠봤다는데, 어머니가 손뜨개질을 좋아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 도전하게 됐다.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게 뜨개질의 장점”이라며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또 뭔가를 다시 만들어 내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고 했다. 
“복잡하지 않아요. 저도 오랫동안 안 하다가 했는데 계속하잖아요. 뜨개질은 핸드메이드여서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나만의 것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아요.”  

뜨개질은 바늘과 실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하다. 운지법을 잘 익히면 오래 앉아서 바느질을 해도 힘들지 않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뜨개질은 바늘과 실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하다. 운지법을 잘 익히면 오래 앉아서 바느질을 해도 힘들지 않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센스뜨개방의 정OO 씨는 22년간 뜨개방을 운영하고 있다. 뜨개방을 찾는 사람은 시니어가 대부분이지만 10대부터 80대까지 연령대가 아주 다양하다고 했다. 
“70대, 80대도 있고, 겨울방학이 되면 어린 여학생도 와서 뜨개질을 배워갑니다. 최근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코바늘로 짠 인형이 한창 유행했어요. 실 색깔이 예쁘니까 관심 두기도 하고, 남자 중에도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다면서 배우러 오는 분도 있었고요.”
정 씨는 “완성된 제품만을 봤을 때 상당히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실과 바늘을 잡는 운지법만 잘 습득한다면 집중해서 오래도록 앉아서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급할 것도 없다. 혹시나 바느질하다가 잘못되면 풀고 다시 하면 된다는 여유가 필요하다. 완성하는 데 목적을 둘 것이 아니라 뜨개질하는 그 순간을 힐링의 시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뜨개질에 관심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뜨개질을 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뜨개질에 관심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뜨개질을 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나름대로 뜨개질을 배우려고 앉아본 뜨개방엔 끊이지 않고 사람이 들어와 앉았다 가기를 반복한다. 나이가 꽤 든 어떤 여성은 딸의 추천으로 뜨개질을 배웠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목도리를 떠내려갔다. 희한한 점은 바둑이 취재로만 끝냈다면, 뜨개질은 실 한 움큼과 바늘을 사 들고 돌아왔다는 점. 굳이 남녀를 구분 짓게 되는 근원을 찾는다면 남자들이 보드게임을 통해 이기고 지는 것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여자들은 뭐라도 내 것으로 남겨 갖는 걸 좋아하는 습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코바느질로 뜨기 시작한 가방. 가방의 바닥 부분만 떠놓은 상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코바느질로 뜨기 시작한 가방. 가방의 바닥 부분만 떠놓은 상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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