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엘리자베스 2세는 우리말을 완벽히 구사했으며,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Elizabeth II mastered our language, loved our culture and touched our hearts.”)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지난달 96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발표한 추도사의 한 대목이다. 그는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육성 영어 성명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이는 프랑스를 방문할 때마다 훌륭한 불어 연설로 감동을 주던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답례로 보인다.

프랑스인들은 오랜 숙적이었던 영국과 영국인에 대해 대체로 애증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녀가 먼저 프랑스를 사랑했고 우리도 그녀를 사랑했다.'(‘She loved France and we loved her back.’) 프랑스 해외방송 ‘France 24'의 영어 기사 제목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5세로 영국 군주에 즉위한 후 프랑스를 다섯 차례 국빈방문하여 열 명의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70년 재위 기간 중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다.

이때마다 엘리자베스 2세를 보기 위해 연도를 메운 파리 시민들은 “여왕 만세! 여왕 만수무강!”(“Vive la reine! Longue vie à la reine!”)을 외치며 영국 여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자신들의 왕과 왕비를 단두대로 보낸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환호성은 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도 모르나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프랑스 문화를 존중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호감의 표시이자 영국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애증의 한 단면이었다.

파리시는 2014년 파리 중심부 시테 섬에 있는 꽃 시장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화훼 시장’(‘Marché aux fleurs Reine Elizabeth II’)으로 개명하여 여왕 참석하에 현판 제막식을 했다. 이 유서 깊은 화훼시장은 1948년 여왕이 신혼 시절 필립 공과 함께 파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특별히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다. 파리에는 이미 그녀의 할아버지인 영국 왕 조지 5세를 기리는 조르주 5세가(街)(Avenue George V)가 있으며 2차 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의 동상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4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주최 국빈 만찬 답사에서 불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자신은 프랑스 국민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간직해 왔다고 말하고, 양국 관계를 ‘우정과 선의의 경쟁, 그리고 경탄의 독특한 복합체’라고 정의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은 쌍둥이와 같다. 그들은 서로 닮은 점에 놀라고 차이점에 매달리며, 근본적인 것이 위협받으면 본능적으로 단결한다.”고 말했다. 두 지도자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연설이다.

프랑스와 영국. 이 두 나라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기본 가치를 공유하면서 경쟁하고 협력하는 가까운 이웃이다. ‘쌍둥이와 같은’ 영국과 프랑스가 카인과 아벨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우호 협력 관계로 전환한 것은 20세기 초다.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는 영불 화친(和親)협정(Entente Cordiale)을 체결, 양국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백년전쟁, 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에서의 식민지 경쟁, 나폴레옹전쟁 등 천년에 걸친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협정은 동맹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후 1차 대전 때 대독 동맹의 초석이 된다.

그 후 2차 대전 때 영국은 드골의 망명 정부에 피난처를 제공하고 프랑스를 나치 독일로부터 구출하는 데 미국과 함께 앞장선다. 영국과 프랑스는 현재 NATO의 회원국이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여러 국제 문제에도 공조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영국해협(영: the (English) Channel, 불: La Manche)은 세계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해로로, 도버 등 영국 6개 도시와 칼레 등 프랑스 9개 도시에 연락선이 수시로 오가고 있다. 또 1994년 준공된 유로 해저터널은 이용자 수가 연 2000만 명에 달한다.

영국 군주의 공식 문장에는 영국 왕의 표어인 ‘Dieu et mon droit’(신과 나의 권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왕권신수설을 의미하는 불어 고어체 표현이다. 11세기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 왕실에서는 불어 고어체가 사용되며 그 이후에도 영국 왕실과 런던은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칼레, 됭케르크, 보르도 등 백년전쟁의 격전지였던 프랑스 도시에는 영국 지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영불 간의 경쟁 관계는 양국의 역사와 영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세계사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백년전쟁(1328~1453 또는 1337~1453)은 프랑스의 왕권과 중앙집권화를 강화시켰다. “영국인을 프랑스로부터 내쫓아라”고 외친 잔 다르크로 상징되는 ‘프랑스인’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즉 프랑스인이라는 국민감정은 잉글랜드인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영국민’(‘the British’)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통합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의 탄생은 프랑스와의 전쟁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와 영국은 1689년부터 1815년까지 ‘제2의 백년전쟁’(‘the second hundred years war’)이라 불리는 여섯 번의 큰 전쟁을 치르는데, 이들 전쟁은 양국에는 물론 세계사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된 프랑스는 대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또 영불 경쟁의 직·간접적인 결과로 미국과 아일랜드는 독립하게 된다. 영국은 유럽에서의 프랑스의 패권에 도전하고 유럽 밖으로의 프랑스의 진출을 저지하며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 세기 동안 세계 최강 국가가 된다.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툼스(Robert Tombs)는 프랑스 태생인 부인 이자벨 툼스(Isabelle Tombs)와의 공저 ‘저 매혹적인 적: 영국과 프랑스, 애증 관계의 역사’(‘That Sweet Enemy: Britain and France, The History of a Love-Hate Relationship’)에서 영불관계를 ‘치열하고 시련이 많았던 관계’(‘an intense and troubled relationship’)라고 정의하고 있다.

애증의 영불관계를 우정과 상호 존중의 관계로 승화시킨 엘리자베스 2세, 70년을 재위한,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였던 그의 국장에는 세계 200여 국에서 500여 명의 국가 정상과 정부 수반, 왕족 등이 참석하여 애도했다. 대영제국은 끝났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개인의 권위와 리더십은 지속되었다. 그의 장례를 지켜보며 제갈량에 대해서 “그런 분은 어쩐지 다시 태어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는 한 촌로의 인물평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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