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나는 8월 18일자 ‘즐거운 세상’에 내보낸 ‘독일어 선생님들은 왜?’ 라는 글에서 ‘황ㅍㅇ’ 교사를 소개한 바 있다. 손목시계를 풀더니 학생이 붕 날아갈 정도로 주먹으로 때려 독일어 공부를 종치게 만든 폭력교사였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독자가 그 선생님 이름을 정확하게 대면서 자신은 맞기는커녕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왔다(아무리 익명 처리를 하더라도 사람 이름 쓸 때 조심해야겠다. ㅎㅎ).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와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수학과 영어에 자신 있었는데, 다른 녀석들이 ‘수학의 정석’이나 ‘정통 종합영어’를 다 떼고 올라왔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다들 처음 배우는 독일어에 몰빵을 했고, 당연히 선생님이 이뻐하셨다고 한다. 괴테의 시 ‘들장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를 줄줄 외웠고, 선생님의 지나가는 말 하나도 놓치지 않을 만큼 경청했다. 두 달 뒤 독일로 유학을 가셨을 때는 편지까지 보낼 정도였다.

그런데, 독일어 선생님이 여교사로 바뀐 뒤 아버지가 독일 대사였던 녀석이 같은 반에 들어왔다. 이 녀석이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여교사와 걸핏하면 독일어로 씨부렁대곤 해 김이 샌 그는 그때부터 독일어 공부하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 몇 개월 배운 걸 지금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 학교 출신들에게 ‘황ㅍㅇ’ 교사는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어떤 블로거도 2009년에 올린 글에서 “고1 때 그 선생님에게 맞아가며 외웠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를 지금도 외우고 술 한잔 걸치면 노래까지 부른다”고 썼다. 더욱이 선생님은 블로그에 들어와 게시판에 인사를 남기기까지 했다. 그는 하이네 시도 외우고 헤르만 헤세, 괴테, 프란츠 카프카와 브레히트 등을 읽고 새까맣게 변한 영한사전과 독한사전을 찾으며 고생이 많았지만 그 시절이 삶의 뿌리라고 썼다. 어떤 학생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는 폭력교사가 다른 학생에게는 늙어서도 연락을 주고받는 은사라니 참 묘하다.

‘독일어 선생님들은 왜?’를 읽은 또 다른 독자는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그렇게 해도 용인되는 세상이었으니 그랬을 겁니다. 다음 편엔 그 시대에도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우했던 선생님 이야기를 기대해 봅니다.”라는 댓글을 내 블로그에 남겼다. 그래서 이번엔 그런 선생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단어 연습을 한 종이를 수업시간마다 숙제(몇 장 이상이었더라?)로 내게 했다. 우리는 그걸 ‘일수(日收)’라고 불렀다. 볼펜을 한꺼번에 두 개 이상씩 쥐고 A4 크기의 종이에 마구마구 꼬부랑 글씨를 그려 새카맣게 만들어 냈다. 영어시간이 되면 ‘일수’를 꿔가고 빌리고 난리가 났다. 숙제를 안 낸 학생들은 손바닥을 내밀게 해 몽둥이로 때렸지만 독일어 선생님들과 비교하면 그건 체벌도 아니었다.

선생님은 갈봄여름 없이 일년 내내 점퍼차림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중공군’인데, 3학년 졸업 무렵 무슨 이유에선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 적이 있다. 그날 그분의 담임 교실에 우르르 몰려가 창 밖에서 소리를 지르며 휘파람을 불어대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선생님은 고2 수업시간에 교과 진도와 관계없이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매슈 아놀드(1822~1888)의 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일부 낭송했다. 원래 켈트 전설에서 유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는 12세기 중세의 로맨스로, 바그너의 오페라와 연극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다루어졌다. 영국 콘월의 기사 트리스탄은 숙부인 콘월의 왕 마크의 약혼녀 이졸데(아일랜드 공주)를 호위해 오던 중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시녀의 실수로 마크와 이졸데가 마셔야 할 ‘사랑의 음료’를 마심으로써 운명적 사랑의 열병에 걸린다. 이졸데는 왕비가 된 뒤에도 트리스탄과 만나다가 발각되고, 트리스탄은 추방된다. 이졸데를 잊지 못해 병상에 누운 트리스탄은 그녀의 도착을 기다리며 결국 숨을 거둔다.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2007년 작이다.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2007년 작이다.

선생님이 낭송해준 것은 병상에 누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만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Raise the light, my page! that I may see her. Thou art come at last, then, haughty Queen!”(횃불을 들어라 얘야, 그녀를 볼 수 있도록. 그대가 드디어 왔구나, 콧대 높은 왕비여!)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그 시는 너무도 인상적이었고, 전문이 궁금해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가 말씀드렸다. 며칠 후 선생님은 분홍색 종이에 손수 타이프를 쳐서 수업시간에 갖고 와 앞자리에 앉은 녀석에게 나를 가리키며 무심한 듯 “쟤 줘라”하고 건넸다. 50년이 넘은 지금도 나는 그걸 고이 간직하고 있다. 켈트어가 섞인 고풍스러운 장문의 영시를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해독할 능력은 없지만, 비극적이고 장중한 남녀의 대화와 그 운율은 가슴을 뛰게 한다.

‘중공군’ 선생님은 예술적 향취가 높았다. 오페라나 그림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간간이 들려주었다. 무슨 말끝엔가 미국의 테너 잔 피어스(Jan Peerce, 1904~1985)를 언급해 오페라 가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한동안 잔 피어스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극적 박력과 긴장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는데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중공군’ 선생님의 사모님은 연기활동이 활발한 유명 탤런트(지금은 80대)이시다. 수년 전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부디 선생님이 건강 평안하시기를 빈다.

교사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와 행동이 학생들에게는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폭력의 상처와 아픔이 오래 가듯 작은 배려와 사랑의 기억도 일생을 간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어가는 교육의 힘과, 선생님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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