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가장 친절한 나라! 인종차별이 없으며 모든 것이 빠르고 모두가 놀랄만큼 양심적인 나라!"

이 나라는 어디인가?

2000년 초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으로 화제를 몰고 왔다가 우리들의 레이더에서 멀어져 있는 이른바 '아줌마 논객' 이경숙 씨는 이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자신의 블로그에서 말한다. 지금 세계에서 해가 진 뒤에 여자가 혼자 마음 놓고 집 밖에 나가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과 일본 정도이고. 카페의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비워도 1,2시간 후에 그대로 있다는 것에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도 믿지를 못한다. 가게 밖에 물건을 내놓고 주인이 보고 있지 않아도 그 가게가 망하지 않는 이유를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단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라는 게 이경숙 씨가 말하는 한국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은 한국에서 살아본 모든 외국인이 자기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망설임 없이 동의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이런 말도 있다;

​한국 사회는 이제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먼저 경제력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전근대 시기 국토의 절반만으로 2018년 기준 GDP(국내총생산) 1조 7000억 달러를 상회하며 세계 10위에 올랐다. 그 위 국가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한 축이었다. 1980년대에 동유럽 국가들을 넘어섰던 한국은 2010년대엔 남유럽 국가들을 추월하고 있다. 남유럽에서 마지막으로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이 이탈리아 정도다.… 최근 주요 서구 선진국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감안하면 ‘젊은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의 사정이 더 나아 보일 정도다.

   대한민국의 대표 공간인 수도서울의 광화문광장.
   대한민국의 대표 공간인 수도서울의 광화문광장.

이 말의 의미는 이미 한국이 남유럽 국가를 추월하고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불렀던 몇몇 나라와 같은 반열로 올라섰다는 뜻이리라. 이런 말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나라가 이미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말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이 그랬듯이 우리들도 더 이상 보고 따라갈 우리의 교과서가 지구상의 나라에는 거의 없으니 우리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 ‘추월시대’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서점가에서 인기를 쓴 책의 머리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선진국에 들어와 있는가? 요즈음 정치, 경제, 사회 현상들을 보면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주장에 아직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말할 때 통상 발전국가 이론이나 종속이론, 근대화 이론 등 정치 경제 이론들은 ‘후진국’이 ‘개발도상국’의 단계를 거쳐 ‘중진국’에 진입하는 것까지만 설명한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학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중진국 함정’을 2010년대에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치고 선진국의 마지노선인 1인당 GDP 3만 달러를 달성해버렸다. 비슷한 소득과 비슷한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3만 달러 국가들이 만들어내는 제품군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화학, 현대중공업이 만들어내는 제품군을 살펴보라. ‘글로벌 넘버원(Global No. 1)’ 제품이 반도체 외에도 수두룩하다. 한동안 경제학자들과 산업사회학자들은 추격의 단계를 넘어서 탈추격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한국의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의 한계를 지적했다. 하지만 탈추격의 상징으로 판단되는 기본 설계 수행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제품을 생산해내는 기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배터리처럼 세계 최고의 부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몇 남지 않은 제조업 기술의 도전 영역은 공작기계(강판 등을 용도에 맞게 정밀하게 깎아내는 기계) 정도이다." ....‘추월시대’ 312쪽.

​이런 설명을 보면 우리가 선진국일 수 있다는 데로 인식이 전환됨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국민소득의 수준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가의 성장과 혁신의 추세까지를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지난 3~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3대 아트페어 ‘프리즈(FRIEZE) 서울’에는 21개국에서 350개 갤러리가 참여해 서울이 홍콩을 넘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시아 미술 허브로 급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방탄소년단(BTS)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이나 영화 '기생충' 등의 세계적 열풍이 미술과 다른 인접 문화예술분야로까지 확산되어 한국의 면모가 일신되는 느낌이다.

"과연 그럴까?" 하면서도 "정말로 그렇다면, 야!, 이거…" 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시대이다.

 한국은 이제 '추월의 터널'을 빠져나가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추월의 터널'을 빠져나가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 선진국을 따라가면서 형성된 우리 사회의 눈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친일/ 좌빨’과 ‘보수/진보’, 이 두 대립쌍은 그동안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를 관통해왔던 분석틀이었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두 대립쌍은 우리 사회를 제대로 비치는 거울이라기보다는 내 편 가르기에 적합한 도구로서 오늘날에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난립을 넘어서는 인식이 필요하다. 저출산 문제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그중 하나이다. 이번 추석연휴에도 젊은 남녀들이 듣기 싫어한 말들은 바뀌어져야 할 대상이다

​"나라가 망하니까 당장 어떻게든 아이를 낳으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떼를 쓰는 듯한 태도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저출산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 궤도에서 파생된 사태라면 ‘해결하지 못하면 망한다’고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칠 충격파를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중기적으로 인구 감소 추이를 감당하면서 한국 사회가 미래 세대를 위하는 사회,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노동권을 중시하는 사회, 아이를 낳으려는 청년세대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추월시대’ 148~149쪽.

​이웃 일본에 대해서도 박상준 와세다대학 국제학술원 교수는 한국이 이미 일본과 대등한 수준의 선진국으로 올라섰다고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일본의 약점을 들춰가며 이제 우리가 따라잡았다고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일본의 단점과 약점뿐만 아니라 장점과 강점도 한국에는 좋은 참고가 된다.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것이 한국에도 유익하다. 이제는 편하게 선진국 대한민국으로 있는 그대로 일본을 바라보자"고 말한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는 '세계의 모범'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는 '세계의 모범'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확실히 '추종의 시대', '추격의 시대'를 넘어서서 '추월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규범과 모랄의 붕괴현상이 아닐까? ‘한강의 기적’과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개인과 사회의 규범, 도덕, 교양. 자존심, 자긍심이 무너졌음을 통감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빨리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우리 스스로의 인간성을 내려놓게 된 것은 아닐까?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이웃 일본을 급속히 따라왔는데 어찌 보면 일본이 정체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1989년 작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쓴 이후 일본인들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올라섰다는 자만으로 점점 안으로 문을 잠그는 바람에 국제화에서 뒤처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에 왔다면 바로 이웃의 길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2022년은 5년 주기로 정권이 교체된 해이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우리 사회가 지녀온 사회발전의 담론이 바뀌는 기회이다. 새 정권이 들어선 지 이제 넉 달을 넘겼다. 새 정부가 아직 정돈이 안 된 것 같은 상황에서 초반부터 흔들어 나무에서 떨어뜨리려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정치 권력의 시계는 5년 주기이다. 우리 사회가 다시 정치에 함몰되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멈추거나 뒤처질 수밖에 없다. 5년이 아니라 10년 이상을 내다보며 진정한 선진국으로서의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

일본의 사회평론가 스기타 사토시(杉田 聰)는 2008년에 낸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에서 경제가 발전하고 국부가 쌓이면서 GNP가 세계 유수의 국가들과 겨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선진국이라 할 수 없으며, 진정한 선진국의 의미는 공업화가 무엇을 중시하고, 발달한 경제력을 어디에 사용하고, 그 결과 나라의 부가 누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우리를 이미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더 차원 높은 모범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이제 세계의 교과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진전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무시하고 버린 가치는 없는가? 우리들의 생각과 인식은 올바른가? 우리가 새롭게 추구할 가치는 어떤 것인가? 쫀쫀하지 않고 품위있는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정치권과 학계, 관계, 산업계, 노동계에서 다 같이 과거의 방식, 눈앞의 현상에만 매몰되지 말고 5년 10년을 넘는 더 긴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방향은 자본주의나 평등주의나 집단이기주의나 개인주의, 나와 우리 집만 생각하고 거기에 갇히는 생각을 넘어서는 것일 게다.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공통의,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생의 가치와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남들이 선진국이라고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현재부터 맡아야 할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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