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역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했지요? 정말로 피하고 싶은 주제지만, 지금 우리들의 역사의식을 바로잡지 않으면 지난 70년 동안 눈물로 이뤄온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제안한 주제입니다.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최근 뉴스 속의 여야 지도자들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제 의도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분들 때문에만 논의하자는 건 아닙니다.

역사관은 누구나 주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관점이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관점에 따라 자기 삶의 목표를 결정하고, 그런 개인들의 소신과 행동 방향이 그 사회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체제를 결정지으니, 깨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접어두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관점만 해도 그랬습니다. 저도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생인데도 마음속으로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고, 1972년 유신 개헌 투표 때는 협조를 안 한다고 혼자 이불보따리를 걸머지고 마곡사 뒷산 너머 월가리로 좌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연재를 쓰려고 자료를 찾다가 문득 이 두 대통령에 대한 걸 읽어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6·25때 곧바로 유엔군과 미군을 불러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던 박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계에서 꼴찌로 두 번째 가난한 나라가 10위 안팎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 1875~1965)과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 1875~1965)과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

제 말이 ‘꼴통 보수의 억지’라고 생각하신다면 1972년 8월 3일 박 대통령이 내린 ‘사채 동결조치’ 전후의 우리나라와 국제 경제 상황을 비교해보시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사채업자들에 의해 좌우되던 시절입니다. 그런 세상에 전 재산을 잃을 그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안 가렸겠지요? 그래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12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91.5%의 지지를 얻어 5·16 혁명으로 자기가 세운 제3공화국을 해산하고 유신시대를 엽니다. 그러니까 그때 저의 반대는 8.5% 속의 반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해인 1973년에는 제1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고 전 세계가 경제 침체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71년에 39억 원이었던 수출 총액이 545억 원으로 급증하고, 국민총생산(GNP)도 전년도에 대비하여 19%나 상승하고, 지금 한국 경제를 이끄는 30대 그룹들도 모두 이 때 출발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우리 경제가 활발해진 것은 동결 조치한 사채를 은행에 넣고 기업에 투자하면 출처를 묻지 않고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사채업자들을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엄령을 내리고, 헌법을 정지시킨 것은 잘못이지요. 특히 야당의 눈에는 묵과할 수 없는 불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그 국민이 굶는데 이미 정해진 구법을 지켜야 한다고 방치한다면 오히려 역사를 외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주제를 역사란 무엇인가로 잡은 것도 모두가 국민을 위한다면서 자기 당, 자기 계열, 자기 자신을 위해 국고를 낭비하기 때문에 생각해보자고 제안한 겁니다.

그래서 자료를 뒤지다가 우연히 공자께서 쓰신 ‘춘추(春秋)’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많은 자료 가운데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아마 우리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이 전통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서구의 역사관을 받아들인 거고, 그래서 의식에서는 서구의 가치관이, 무의식 속에서는 전통적 가치관이 작동하다가 충돌을 일으키고, 필요에 따라 오고가면서 ‘내로남불’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작동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내용을 알고 골라든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제가 원하는 자료를 골랐더군요. 이제까지 ‘춘추’는 공자님의 일상에 대한 생각을 쓰신 것으로 알았는데 춘추시대 노나라 사관들이 쓴 사서(史書)에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논평과 대안을 덧붙여 펴낸 책으로, ‘포폄(褒貶)’과 ‘감계(鑑誡)’를 강조하고, 한자문화권의 역사관과 역사를 기술하는 기본 어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후세 관리들이 거울로 삼아 자신의 행위를 되비쳐 보도록[鑑誡] 만들기 위해 펴낸 책인 겁니다.

대충 훑어본 다음 이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내세울 가치관 내지 역사관은 ‘정명(正名)’과 ‘상고(尙古)’로 삼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들대요. 정명은 ‘논어(論語)’의 자로(子路)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자로가 공자님께 정치를 한다면 무엇부터 하실 것이냐고 질문하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 正名乎]”고 한 말씀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그러면서 이름과 사실이 다르면 본질이 달라진다면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고 주장하셨다는 겁니다. 맞는 말이데요. 지금 우리가 TV를 켤 때마다 당황하는 것은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않고, 당 대표가 당 대표답지 않아 그들의 말과 행동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니까요.

또 ‘상고’는 옛날 문물이나 사상, 제도 등을 귀하게 여기고 모범으로 삼는 행위로, ‘춘추’는 물론 유학(儒學) 전체에서 고루 발견할 수 있는 사상이더군요. 하지만, 지금 우리와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데요. 저부터 우리 모두는 ‘빨리빨리 주의’이고, 그래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믿고. 심지어 산업분야도 속도를 중시하는 반도체와 자동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으니….

그러다가 이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데요. 그러니까 인간의 문제는 상고주의를, 생업의 문제는 ‘빨리빨리 주의’를 택해야 한다는…. 어떤 가치관이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수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음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물론 바꿔야 할 것들은 빨리 바꿔야 하겠지요. 하지만 곧바로 바꾸지 말고 ‘바꾸려 하는 것’과 ‘새것’을 대조하여 장점을 합치고 단점을 조정하는 ‘패스티쉬(pastiche)’ 방법으로 바꾸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더군요. 비교하고 조절하는 과정이 낭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홍보가 되고, 또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이와 같은 ‘춘추’는 아주 간결하고, 용어들을 엄격히 구사해 일반인들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대요. 그래서 계속 주석서(註釋書)들이 등장하고, ‘춘추학(春秋學)’이 성립했다고 합니다. 후한 시절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의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23가지 948편이나 된다고 하니 역사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이 가운데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을 꼽더군요.

다시 저는 이와 같은 춘추 사상을 현대와 어떻게 접맥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청나라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강유위(康有爲, 1858~1927)의 ‘대동설(大同說)’을 참조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강조이, 중국 남부 광동성의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송학(宋學)을 위주로 경세치용의 학문을 공부하다가 1898년 광서제(光緖帝, 1871∼1908)의 ‘변법자강(變法自疆) 정책’을 받아들여 국회를 열고 헌법을 만드는 등 정치개혁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 자강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처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광범위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서태후(西太后, 1836~1908)를 비롯한 보수 세력에 밀려 백일천하로 끝납니다.

그래서 상하이를 점령한 서양인들의 식민정치를 보고 중국의 장래가 걱정되어 서양 서적을 번역하고, 유럽 신사조를 받아들이면서 사학ㆍ불교학ㆍ공양학을 합치려고 합니다. 공양학(公羊學)은 앞에서 말한 전국(戰國)시대 제나라의 학자 공양고(公羊高)의 ‘공양전’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철학을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서구와 중국 사학을 결합하려고 한 것은 중국 철학이나 사학은 근대 이전에 초점을 맞춰 유물론적이고 실증적인 부분이 빈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사후에 펴낸 ‘대동서’(1935)를 살펴보면 동서고금의 역사, 사상, 풍속, 법률 등을 비롯해 폭정과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 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면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덕을 근간으로 공자가 꿈꾸던 ‘차별이 없고 모두 합동하여 화평하게 사는 세상’을 제시합니다.

제가 그를 주목한 것은 단지 한자문화권의 전통을 잘 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평등을 추구하고. 남녀평등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에까지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구계(九界)’의 통일과 화합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부추김을 받은 홍위병(紅衛兵)들은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내세워 그의 묘를 파헤쳐서 머리를 잘라 조리 돌림을 하고 청도(靑島)시의 전람회에 전시했다고 합니다. ‘조반유리’는 모든 반항이나 반란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홍위병을 부추기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이 내세운 구호입니다.

어느덧 예정한 지면이 넘치고 있네요. 지난 호에는 누구나 자기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면서 전문가들의 글쓰기를 이야기했대요. 다음 10월 15일에는 시니어들의 자서전이나 수필 쓰기 방법을 함께 알아보기로 합시다. 안녕, 안녕. 그때 만나요. (♥)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