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혜화 유치원 동창생 이성낙, 지섭 씨

그 누구의 우정도 부럽지 않은 브로맨티스트 이성낙, 지섭 씨. 사진 구혜정 기자.
그 누구의 우정도 부럽지 않은 브로맨티스트 이성낙, 지섭 씨. 사진 구혜정 기자.

지금까지 이런 동창생은 없었다. 고교부터 출발한 인연만으로도 "대단하다", "진정한 우정이다"라고 평할 만한데, 이들의 시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코흘리개 유치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피란학교를 함께 다녔고,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80이 훨씬 넘어서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 아니 우정을 다지고 있는 이성낙(84), 지섭(83) 씨. 끈끈한 두 사람 사이에 앉으니 기나긴 여정이 흑백영화에서 컬러로, UHD 화면으로 바뀌어 가는 듯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지섭 씨는 곧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성낙 씨는 오래전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지만, 지섭 씨는 프랑스로 유학 간 뒤 세계 다양한 곳에 살다가 현재는 프랑스 보르도에 정착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에 오는데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 만날 수 있었다. 보르도에 사는 이유를 물으니 당연히 와인 때문이라고 했다.

지섭 와인과 생선을 많이 먹고 싶어서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에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로 밖에 잘 못 나가니까 와인을 더 많이 마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1944년, 혜화동성당 부설 혜화유치원에서부터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6번지 골목대장을 했을 법한 지섭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마치 아이가 된 듯했다.

지섭 혜화유치원을 나와 혜화초등학교, 보성중‧고등학교(현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를 나왔습니다. 둘 다요. 나중에 총리가 된 장면 씨가 혜화유치원 원장이셨는데, 그분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셨을 때 엄마들이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셨어요(웃음). 아들들하고도 친하게 지냈고요. 

이성낙 유치원 때 지 박사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친구였어요. 덩치 크지, 잘생겼지. 초등학교 때도 인기가 많았고요. 지 박사는 혜화동에 쭉 살았는데,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장충단 쪽으로 이사 갔어요. 주변에 서울사대부고 등이 있어서 부모님이 학교를 옮겨주겠다고 하셨는데 싫다고 했습니다. 

아홉 살 아이였지만 요즘 아이들과 달랐다. 지금 아이와 비교 불가다. 어린 이성낙 씨는 친구들과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아 2학년부터 5학년까지 혼자 전차를 타고 통학했다.

장충단에서 걸어 내려와 을지로4가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초등학교가 있는 혜화동까지 통학했다는 이성낙 씨. 서울의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됐다.
장충단에서 걸어 내려와 을지로4가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초등학교가 있는 혜화동까지 통학했다는 이성낙 씨. 서울의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됐다.

이성낙 집에서부터 을지로 4가까지 걸어갔어요. 그곳에서 돈암동 가는 전차를 타고 가다가 혜화동에서 내렸어요. 1~2시간 걸렸는데 추운 겨울 눈보라가 쳐도 학교는 꼭 갔답니다.

이들이 대학교 입학 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죽마고우라고 말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고 했다. 유년 시절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된 계기는 부산 피란 시절 임시학교에서였다.

지섭 한국전쟁이 났잖아요. 6학년 여름 때는 집에서 좀 버텼어요. 가을에는 전쟁이 끝나겠지 했는데 북에서 밀고 온다고 해서 부산으로 피란 갔죠. 산등성이 판잣집에 임시학교가 생겼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이성낙 대부분 부산으로 갔는데 저는 마산으로 갔습니다. 선친의 잘사는 친구분이 그곳에서 파초라는 이름의 여관을 하고 계셨답니다. 서울에 살 때는 전차 타고, 피란 와서는 기차 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전시라 군수물자를 실은 기차를 먼저 보내다 보니 제시간에 학교에 도착한 적이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 마련된 임시 학교에 가보니 옛날 보던 친구들이 보였어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어도 그렇게 교류가 있던 게 아니었어요. 옛정도 있고 이후부터 아주 친하게 지냈죠. ‘혜화동 친구들’이라 해서 다섯 명이 지금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세 명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저희는 유럽으로 갔고요.

혜화동 6번지를 주름잡았다는 혜화동 친구들의 어린 시절 단체 사진. 1956년 해인사. 가운데가 이성낙 씨이고 맨 오른쪽이 지섭 씨다. 사진 이성낙 제공.
혜화동 6번지를 주름잡았다는 혜화동 친구들의 어린 시절 단체 사진. 1956년 해인사. 가운데가 이성낙 씨이고 맨 오른쪽이 지섭 씨다. 사진 이성낙 제공.
1957년 보성고교 졸업 즈음 찍은 사진이다. 당시 보성고는 국내 유일 두발자유화에 이름표도 달지 않았다. 왼쪽이 이성낙, 오른쪽이 지섭 씨. 사진 이성낙 제공.
1957년 보성고교 졸업 즈음 찍은 사진이다. 당시 보성고는 국내 유일 두발자유화에 이름표도 달지 않았다. 왼쪽이 이성낙, 오른쪽이 지섭 씨. 사진 이성낙 제공.

어린 시절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참을 내달렸다. 오래전 과거 이야기지만 계절과 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수채화 혹은 유화처럼 머리에 그려졌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6번지 골목을 뛰어놀던 아이들은 어느덧 백발의 중절모를 쓴 나이 지긋한 신사가 됐다. 공간을 초월해 우정을 나누고 서로를 기다려주는 고마운 사이다. 그들이 좀 특이했던 건 오래된 친구 사이임에도 ‘지 박사’, ‘이 교수’로 부른다는 점이다. 남자 친구들 사이에 있을 법한 장난기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뭔지 모를 안심과 믿음, 함께하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미술의 바닷속에서 다시 만난 친구
유년 시절과 청년기를 지나 ‘브로맨스(영어 브라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로 남자들의 진한 우정을 말하는 합성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만큼의 사이로 발전한 계기가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사이 미술에 눈을 뜨고 무한한 관심을 두게 됐단다.

이성낙 저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독일 유학 가서 공부를 마치고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지 박사는 1963년에 프랑스 유도회 초청으로 프랑스에 갔죠. 그때부터 지 박사가 독일에 오기도 하고 제가 프랑스에도 가고 그랬죠. 어느 날 집사람하고 지 박사 신혼집에 갔는데, 서가에 전시회 카탈로그가 많은 거예요. 나도 그림이라면 아주 좋아하던 때였습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들이 책 속에 있는데 대화가 되는 거예요. 그런 취미가 있는지 몰랐지만 지 박사가 그림에 대해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2019년 도쿄 롯본기(六本木)힐스 광장. 대형 거미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 Bourgeois, 1911~2010)의 작품이다. 미술관 찾아가는 길목 광장에서. 두 사람이 항상 함께 다니니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사진 이성낙 제공.
2019년 도쿄 롯본기(六本木)힐스 광장. 대형 거미는 루이스 부르주아(Louis Bourgeois, 1911~2010)의 작품이다. 미술관 찾아가는 길목 광장에서. 두 사람이 항상 함께 다니니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사진 이성낙 제공.

그때부터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만났다. 함께 미술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탐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관심사를 알고 난 뒤 지금까지도 그들의 발걸음은 쉼 없이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향한다고 했다.

지섭 베를린, 뮌헨, 뉴욕, 런던... 은퇴한 다음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아까 얘기했던 혜화동친구들 다섯은 더 친하고 덜 친하고가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 세 명은 미국에서 공부했고, 우리는 유럽에서 공부해서 유럽 사람 정서가 있어요. 가끔은 미국에서 공부한 친구들이 이해 못 하는 우리만의 공감대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유럽은 나라와 나라도 많이 다른데 도시 안에서도 다 다릅니다. 미술관도 일률적이지 않고 색다른 개성이 존재해요. 예를 들어 어떤 전시를 파리에서 하고 런던에서도 하고 그다음에 미국 뉴욕으로 가면 그때마다 전시 기술이 달라요. 저는 파리 전시관에서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재미를 좀 더 좋아하고 그렇습니다. 

이성낙 우리 둘을 가깝게 묶는 것은 역시 미술입니다, 저희가 만나면 정말 강행군입니다.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나와서 밤 10시는 돼야 호텔로 돌아갑니다. 오전에 두 곳, 오후에 두 곳, 이렇게 4~5일은 다닙니다. 하루에 2만 5천 걸음을 걷더라고요. 정말 육체적으로 힘듭니다, 그래도 꼭 같이 다녔습니다. 남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은 언제 봐도 새롭습니다. 

지섭 씨가 한국에 있는 중에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중요한 전시는 빼지 않고 찾아다녔다고 했다. 당시 다녀왔다는 한 서예전에서 본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와 한동안 그 이야기에 잠시나마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성낙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미술 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종종 강의도 하고 말이죠. 우리는 우정을 다진다는 말도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만나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지섭 우리는 사는 날까지 함께할 겁니다. 한국과 유럽 사람의 정서를 가지고 말이죠.

연인이나 부부 사이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에 심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가 가까워지기 위해 취미를 가져보거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알고 있었지만, 더 깊은 사랑과 우정을 이어가는 방법을 그들은 찾아내고 또 지금도 매일 매일 그리고 있을 것이다.

우정이라는 말을 넘어 살아 있는 날까지 함께 할, 둘도 없는 친구들이 밝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우정이라는 말을 넘어 살아 있는 날까지 함께 할, 둘도 없는 친구들이 밝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이성낙 서울 보성고를 졸업하고 1950년대 독일 마르부르크 의대 예과에 들어가 전액 장학금과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했다. 독일 뮌헨대에서 의학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크푸르트대에서 피부과 전문의와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아주대 의대 초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이며, 2014년에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수여한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지섭 고려대 경제학과 57학번으로 재학 시절인 1963년에 대한 학생유도연맹 학생 임원 자격으로 프랑스 유도회에 초청됐다. 이후 1968년 툴루즈대에서 ‘사회보장제도-재분배적 역할’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박사를 취득했다. 1969년 귀국해 보사부 전문위원으로 경제개발계획에 사회보장제도를 반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3년 유엔본부 유니세프에 스카우트됐으며, 유니세프 아프리카 총괄책임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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