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1980년대 중·후반 미국 유학 시절, 도서관에서 신문 잡지, 기타 정기 간행물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영화 관련 잡지를 가장 먼저 읽어보는 행운을 누리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짤막한 기사가 한 편 있다. ‘관객이 뽑은 할리우드 10대 사랑 영화’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순위는 가물가물하지만 영화 목록만큼은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른다.

러브스토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 로마의 휴일, 로미오와 줄리엣, 졸업, 사운드 오브 뮤직, 카사블랑카, 그리고 ET, 애정의 조건이 이름을 올렸던 것 같다. 이상 열 편의 영화를 한 편도 빠짐없이 감상했는데, 어린이와 외계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 ‘ET’와 엄마와 딸의 애증관계를 담은 영화 ‘애정의 조건’이 미국 관객들로부터 많은 표를 얻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의 사랑 영화 대부분은 일생에 꼭 한 번 찾아온다는 운명적 만남을 시작으로 낭만적 사랑, 열정적 사랑, 격정적 사랑, 무조건적 사랑 등을 훌륭하게 짜인 풍성한 스토리 속에 아름답게 담아냄으로써, 오랜 기간 관객들로부터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데 언제부턴가 이런 종류의 사랑 영화를 영화관에서 만나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졌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사랑 연구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모로코 태생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 1961~)는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사랑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범주화되기 시작했음에 주목한다. 일루즈에 따르면 1813년 발표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과, 1996년 발표된 헬렌 필딩의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사이엔, 주인공의 사랑 경험을 둘러싸고 의미심장한 차이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 이스라엘 히브루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다.
       에바 일루즈. 이스라엘 히브루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다.

오스틴의 소설은 문화인류학자와 사회심리학자들로부터 당대의 구애(求愛) 과정 및 배우자 선택을 주제로 한 최고의 민속지학(ethnography)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실제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정교한 결혼 플롯에 따라 결혼의 득실을 따지면서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어필하고 약점은 최선을 다해 포장하는 가운데 미묘하면서도 짜릿한 밀당을 전개해간다. 그러다 설혹 주인공들끼리 실연(失戀)하는 상황에 이른다 해도 이를 ‘아프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가문의 격이 맞지 않아서라든가 결혼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든가 행운의 여신이 나를 비켜갔다든가 등 실연의 원인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며 의연하게 헤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오면 사랑은 철저하게 감정적 상태로 치환되고, 연인의 반응에 따라 하루에도 서너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감은 물론, 실연의 책임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돌린 채 상처받기 쉬운 병적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소설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한데, 결국 결혼이 중요한 공적 과업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지극히 사적인 선택지로 변화하게 되면서, 사랑의 감정화와 더불어 사랑의 여성화 현상이 뚜렷해졌다는 것이 일루즈의 분석이다.

특히 사랑의 여성화 현상이 등장하면서 감정적 충만함과 소통을 중시하는 여성의 사랑법이 유일한 정답으로 인식됨에 따라, 여성은 자신들과 다르게 접근하는 남성의 사랑법을 폄훼하거나 남성의 진정성을 오해함은 물론, 사랑할 줄 모르는 감정의 불구자인 남성으로 인해 다시금 상처받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아예 연애 자체를 포기하는 세대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우려가 앞선다. 하기야 미국의 대학가에선 데이팅이란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요, 일본의 신세대 중엔 모태솔로 비중이 3명 중 1명에 이른다고 한다. 뿐이랴, 동·서양 막론하고 최근 추세는 오랜 기간의 헌신과 이타주의 및 양보를 요구하는 commitment보다는 원할 때 들어가고 원치 않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네트워크를 훨씬 선호한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고립이 일상화된 시대,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향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사랑에 부여하는 의미나 사랑을 경험하는 방식이 고정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되고 변형된다는 통찰이야말로 일루즈의 분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인 것 같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를 아프게 휘젓는 사랑 대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사랑 각본을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할 때인 듯하다. 그 각본 속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인지는 나 자신도 궁금하다. 다만 하나의 정답이나 모범답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테니, 다채로운 사랑법이 꽃처럼 밝게 많이 피어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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