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희곡 읽기 모임 ‘세상을 품은 마을’

지난 5월 28일 양천중앙도서관 중앙홀에서 공연된 안톤 체호프 단막극 '결혼 피로연' 기념 촬영. 사진 세상을 품은 마을 제공.

우연한 기회였다. 한 개척교회 목사의 제안으로 교회는 마을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 예술 공간이 됐다. 그와 뜻을 함께한 사람은 음악도 미술도 아닌 연극 전문가였기에 희곡, 그것도 고전 희곡이 그들의 주제가 됐다. 누가 모일까, 어떤 사람이 올까 싶었는데 하나둘 문을 두드리고 연극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창대한 날갯짓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고전 희곡 읽기 모임 ‘세상을 품은 마을(이하 세품마)’이 됐다. 세품마 회원을 대표해 홍성헌 감독, 원은실 회장, 전종만 회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홍성헌 감독 2013년에 양천구에 있는 청소년대안학교에서 연극과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학교를 운영하던 분의 남편이 한 예배당 목사셨습니다. 교회를 문화공간으로 이용해 보자고 하셨어요. 이후 저는 몸담고 있던 극단자유마당을 나왔고 ‘스페이스 내안’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이름이 ‘내안’이거든요. 교회 공간 자체를 소공연장처럼 꾸며서 마을 사람들과 관계 맺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역 주민과 연극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의 세품마로 이어졌습니다. 

광고 벽보를 동네 곳곳에 붙이니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명, 7~8명까지는 금방 늘었다. 2018년 8월 양천구민극단으로 공식 출범한 고전 희곡 읽기 모임 '세품마'는 '2019 양천문화재단 예술교육지원 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열렸던 낭독극 '한여름 밤의 꿈'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 회장인 원은실 씨와 전종만 씨도 그때부터 참여했다. 

2019년 양천공원에서 공연된 낭독극 '한여름 밤의 꿈' 의 한 장면. 사진 세상을 품은 마을 제공.

원은실 회장 2019년 8월에 양천공원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낭독 공연을 했는데 저는 두 달 전인 6월에 지인의 소개로 들어왔습니다. 고전 희곡을 읽는 모임이라는 말에 매력을 느꼈어요. 들어와서 다양한 분들도 만나고 낭독 공연을 하고 나니 성취감도 생겼고요. 연극을 통해 일상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나이 제한이 없지만, 시니어가 중심이고 16명 정도가 회비를 내고 계세요. 다양한 분들이 계십니다. 화가. 시인. 상담 전문가도 계시고요. 고3 어머니라서 요새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요. 

양천구에서 시작한 모임이라 이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코로나가 분위기를 살짝 바꿔놓았다.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 모임으로 전환하자 관심 있어 하던 다른 지역 주민도 참여했다. 

전종만 회원 코로나로 한참 모임을 못하고 있었는데, 다른 모임들이 줌으로 모임을 한다기에 저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독님 지인들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축소될 줄 알았는데 모임이 커졌습니다. 하남, 강남, 울산에서도 참여하시고요. 꾸준하게 모임을 했습니다. 공연한 다음 날 정도 회원 합의로 쉬는 거면 모를까 명절과 공휴일을 빼고 매주 월요일은 꼭 만납니다. 

회원들은 현재 매주 월요일 저녁 서울 양천구 양천중앙도서관에 모인다. 지난해 문을 연 양천중앙도서관이 동아리 지원 사업을 추진했고, 세품마가 이 사업에 선정됐다. 현재는 연습 공간과 동아리 지원금 등을 제공받으며 마을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원은실 동아리 지원사업에 선정되기 전에는 모임 장소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감독님 지인의 소개로 마련된 지하 연습실에서 모였는데, 장마로 한 번 침수된 이후에 환경이 나빠졌어요. 60세 이상 회원이 많고 저녁에 모이면 무서울 때도 있었어요. 다행히 지금은 도서관 세미나실을 쓸 수 있어서 좋아요. 장소 때문에 매번 고민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 없습니다. 온라인 회의 문화가 이제는 정착돼서 도서관에서 모일 때 줌도 열어서 오지 못한 회원과도 함께 희곡을 읽습니다. 

고전희곡 읽기 모임답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물론 안톤 체호프, 유럽의 고전 등을 섭렵했다. 지난 5월 28일 회원들은 낭독이 아닌 연기에 도전, 도서관 중앙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결혼 피로연' 공연 초대장. 사진 세상을 품은 마을 제공.
'결혼 피로연' 공연 초대장. 사진 세상을 품은 마을 제공.

전종만 체호프의 단막극 '결혼 피로연'을 공연했습니다. 러시아 작품이라서 사람 이름 발음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정말 모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홍보도 많이 안 했는데 100명쯤 오셨어요. 제가 최근에 또 다른 동아리 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 계신 한 분이 그 공연을 봤다고 하셨어요. 전혀 모르는 분이었는데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연극 모임 하는 이유를 묻자 원은실 씨와 전종만 씨는 제2 인생을 채워나갈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원은실 힐링이 하고 싶었어요. 일상의 엄마, 일 이런 게 아닌 온전히 몰입이 필요했습니다. 연극은 부담스럽지만 희곡 낭독은 매력적이고요. 짧은 순간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거잖아요. 계속하니 재밌고요. 

전종만 저도 재밌으니까 합니다. 저는 캘리프래피도 배우는데요. 이런 모임에 들어오고 새로운 것을 하는 이유는 제 주위 인간관계를 좀 바꾸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양천구청에서 30여 년 공무원 생활하고 보니 대부분이 직장에서 만난 사이더라고요. 각각 커뮤니티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바뀌잖아요. 캘리프래피도, 연극을 하는 것도 그렇고요. 새로운 인생을 잘 살아가자는 의미입니다. 6개월 전쯤 퇴직했는데, 예전부터 꾸준하게 은퇴 준비를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고전 희곡 읽기였어요.

홍 감독의 경우는 좀 달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벤치마킹한 학교로 알려진 체코 프라하 공연예술아카데미 출신인 그는 중앙 집중화한 상업 연극이 아닌 지역, 마을도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연극 세상을 이루는 주축이 시니어 세대였던 셈이다.

홍성헌 제가 그리는 청사진이 있어요. 전공자이다 보니 작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시스템을 마을 안에서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공부했던 체코는 지역 주민이 일상에서 연극을 쉽게 접하고 새로운 경험을 해볼 기회가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연극도 자본에 의해 제약되는 시스템인데 그걸 좀 깨보고 싶습니다. 연극에 참여하는 회원들은 전문 배우가 아니어서 공연이 스트레스이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도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거창한 무대가 아니더라도 안정적으로 활동해나갈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을 조성했으면 합니다. 

왼쪽부터 홍성헌 감독, 원은실 회장, 전종만 회원.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전종만 홍 감독님이 저희와 함께 참 많은 것을 시도하세요. 그래도 희곡을 읽었으니 낭독공연이건 연극이건 공연 활동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활동하면서 결실 본 것도 있었어요. 2020년에 있었던 제94회 점자 기념일 공모전 ‘도서 <내 아버지 박두성> 입체낭독’에서 저희가 녹음해서 출품한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30만 원은 양천해누리복지관에 기부했고요.

이들은 희곡을 읽고 연극을 알아가되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은실 저희가 상반기에 해보지 않았던 도전을 했어요. 낭독만 하다가 암기해서 공연했으니까요. 현재 계획으로는 모임을 유지하면서 고전 희곡을 읽는 겁니다.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다시 또 읽어볼까 합니다. 읽었던 작품도 다시 읽어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홍성헌 급하게 공연을 올리지는 않을 겁니다. 기존 회원이 계시고 또 새로운 분들도 들어오실 겁니다. 낭독극이든 단편, 혹은 라디오극이든 회원들과 상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경력을 쌓아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조금 욕심이 있다면 연령대와 성별이 조금 다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울리면 좋잖아요. 

얘기를 다 듣고 보니 세품마에는 그저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이 없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작품을 대하고 무대에 서는 순간만큼은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처음 세품마 회원을 만났을 때 홍 감독이 직접 번역한 체코 고전 희곡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야로슬라프 하셰크)’를 읽고 있었다. 조금은 쉬운 작품으로 접근할 법도 하지만, 여느 희곡 모임에서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바람처럼 지역 연극이 활성화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홍성헌 감독이 번역한 체코 작품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를 읽고 있는 세품마 회원.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홍성헌 감독이 번역한 체코 작품 ‘용감한 병사 슈베이크'를 읽고 있는 세품마 회원.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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