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이번 이야기는 즐겁지 않다. 그래도 ‘즐거운 세상’을 지향하며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고등학교 동기동창회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A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 B와 이야기를 하다가 1967년 고교 1학년 때의 독일어 선생님이 이미 4개월 전에 돌아가신 걸 알게 됐다. 30cm 크기의 몽둥이를 갖고 다니며 학생들을 때리던 선생님이다. 때리는 곳은 항상 이마였는데, 한번 맞으면 하늘이 빙빙 돌았고 픽 쓰러지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독일어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이름과 비슷한 발음으로 그를 ‘지겨훈’이라고 불렀다. 수업에 앞서 인사를 받을 때 선생님의 눈동자가 어떻게나 좌우로 빨리 움직이던지 그때부터 교실에선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퇴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겨훈’은 조퇴했던 학생들을 그다음 수업시간에 잊지도 않고 불러 세워 이유를 캐묻곤 했다.

당시는 대학에 독문과가 개설되기 전이어서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은 거의 다 철학과 출신이었다. ‘지겨훈’도 철학과를 나왔는데, 수업시간에 간간이 칸트와 괴테를 이야기하고 Eschatology(종말론)를 소개하는 등 독일의 철학과 문화에 대해 10대 소년들의 감수성을 높여주었다. 여러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말투와 몸짓을 흉내낼 만큼 그의 영향을 받았다. A가 독문과를 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선생님의 영향이었다.

그렇게 공포와 경원(존경하지만 가까이하지는 않음)의 대상이던 선생님은 학생들이 2학년 때 독일 유학을 가느라 학교를 떠났다. 그분이 후임으로 추천한 독일어 선생님(대학 친구라고 했다)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지만, 학생들은 어쨌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A는 뒤늦게 알게 된 선생님의 타계 소식을 고교 단톡방에 올렸다. 국가기구의 장도 맡았던 저명한 대학교수요 가톨릭 신자였던지라 언론에 부음기사도 실려 있었다. 가장 먼저 올라온 반응은 “뭐 때리기만 했지, 선생은 아닌 것 같은데요. 뭐 느낌도 없네요.”라는 댓글이었다. 이런 글을 쓴 C는 ‘지겨훈’에 한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 같은 시기에 재직했던 H선생님(국어 담당)의 부음이 또 들어왔다고 한다. 동료 교사의 영향으로 카메라를 잡게 돼 그분보다 더 유명한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대학교수로 퇴직한 선생님이다. A가 그 부음도 단톡방에 올리자 조의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는 댓글이 잇따랐다. 문제는 온화한 성정의 H선생님과 ‘지겨훈’ 선생님에 대한 반응이 상반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C는 “고1 다 큰 놈들한테 독일어 불완전동사 못 외운다고 서울대 수위한테 도장 받아오라고 팬티 바람으로 내보낸 것도 스승입니까? 아니지요. 잘 가셨네요.”라고 쓰기까지 했다. A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나무랐지만 D라는 녀석이 가세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본인의 인생관에 동의 또는 복종하라고 강요했던 선생님? 난 한 번도 짜리몽땅한 몽둥이로 안 맞아봤지만… 학교 다닐 때는 솔직히 저런 것도 선생인가 싶더만.”

그 이후 아래와 같은 댓글이 어지럽게 단톡방에서 공방을 벌였다.

-한 인간의 삶이 마감된 것을 개인 입장에서 애정으로 애도하거나 추억으로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글로 죽음을 폄훼하는 것은 사제지간을 떠나 반백년의 시간이 아쉽다고 느껴진다. 마음 한편에 쌓아둔 두 교우를 위해 오늘 처음으로 카톡을 해본다.

-두 분 선생님 편히 쉬소서.

-내 어머니께서 국민학교 선생을 25년 하셨는데, 팔순 때 제자들이 한 상 잘 차려놓고 한 말씀 하시라 할 때 “내가 뭐 알아서 가르친 게 있나, 너희들이 다 잘 찾아 배우고 깨치고 했지. 난 옆에서 용기 주고 격려하고 했지, 가르치려 하지 않고 찾아가기를 기다렸을 뿐이야.” 이런 투로 격려사를 했던 거 같은데요. 내 어머니랑 비교해도 너무 아닌 것은 아니지요. 그저 때리고 한시간 동안 공포 분위기 잡고 한 분을 어찌 존경합니까?

-H선생님은 정말 인간적인 선생님. 각자 생각이니까...

-나도 고2 때 딱 한 대 맞아봤는데 하늘이 빙빙 돌더이다. 하지만 옛날이야 어찌됐든 반백년이 지났고 그 시간이면 원한이 맺혔어도 풀릴 만한 세월이고, 더구나 이미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나신 분들이니 최소한의 예의는 지킵시다. 어쨌든 우린 그분들에게서 배우며 컸고 그 덕분에 지금이 있는 거니까 고인께 누가 되는 표현은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소서.

-여기는 동기동창회 게시판입니다. 명복은 두 분 선생님 유족에게들 비세요.

-스스로 조의를 표하는데 여기서 하는 게 무슨 그리 큰 문제가 되나?

-문제야 되겠나. 하지만 가족들에게 하란 말이야. ㅆ.

-가족하고 연락 잘 되는 사람은 직접 하고….

-바보 같은 놈들 그냥 자라.

-옛 스승님의 부음을 접하고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빕니다.

A는 정말 놀랐다고 한다. 벌써 55년 전의 일인데 그때 당했던 체벌과 폭력을 이렇게도 잊지 않고 한이 맺혀 있다니. ‘지겨훈’ 선생님 체벌의 압권은 위에도 나오지만 겨울에 팬티 바람으로 운동장 눈밭에서 의자를 들고 서 있게 하거나 학교에서 1km가 넘는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의 일이다)까지 팬티만 입고 뛰어갔다 오게 한 것이다(가는 길 중간엔 여고도 있었다).

A의 경우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악몽 같았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담임 선생님은 무슨 자격지심에선지 친구의 아들을 거의 학대하듯 본보기로 괴롭혔고, A는 정말 학교 다니기가 싫었다고 한다. 여름방학 중 선생님이 작두질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2학기에 담임교사가 바뀌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A는 다행스럽게도 ‘지겨훈’ 선생님한테서는 그런 체벌을 받거나 몽둥이로 맞은 적이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을 증오하게 된 친구들이 안됐다 싶으면서도 ‘그래도 그렇지. 이미 돌아가신 마당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들이 얻어맞는 세상 아닌가. 체벌도 금지돼 있고 학생인권만 따지는 요즘 세상에 교사들은 정말 힘이 들 것이다.

명심보감 훈자(訓子)편에는 “연아다여봉(憐兒多與棒) 증아다여식(憎兒多與食)”,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많이 때리고, 아이를 미워하거든 먹을 것을 많이 주라는 말이 나오지만 정말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어려서 받은 것은 사랑이든 폭력이든 체벌이든 평생을 간다. 두렵고 어려운 일 아닌가. 어느 누구든 한번 맺은 사제의 인연은 아름답고 도타운 정이 흐르는 추억이 되기를, 그리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힘이 되기를,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굳건한 바탕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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