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혁명시대의 ‘쿠피티션’ 교육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지난 연재 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없어질 직업들을 읽고 걱정하셨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가 할 일들을 다 하는 시대가 와도 그걸 계획하고 결정하는 건 사람이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사회의 구조와 이념을 잘 아는 분들은 ‘킹 왕 짱’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이번 연재 제목 ‘쿠피티션(coopetition)’이 무슨 뜻이냐고요? 네에. 3차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미래 사회는 과거처럼 싸워 이긴 사람이 모두를 다 가져가는 ‘제로 섬(zero sum) 게임’보다는 서로 ‘협력(cooperation)’하고 ‘경쟁(competition)’해 이룬 것 가운데 기여한 만큼 가져가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만들어낸 조어(造語)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그때 예고한 시대라는 것은 집 앞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TV를 켤 때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의 ‘포인트’와 ‘쿠폰’ 전략은 구매자에게 덤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거래자를 묶어놓기 위한 전략이고, 그 제품을 만들어낸 기업들 역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과 연구소와 ‘공동 연구 개발(R & D)’을 위한 협정 속에서 움직이고, TV를 켤 때마다 시사평론가들이 걱정하는 물가 상승과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은 아주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살려면 우선 ‘협력과 경쟁’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려면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연재에 여러 분들을 걱정스럽게 만들 직업 현황을 이야기하고 나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금쪽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기성세대인 우리는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검토해봐야겠데요.

그러나 40여 년간 초, 고, 대학에서 살아온 제 교육 경력을 더듬어 봐도 이런 경쟁과 협력의 방법을 가르친 적이 없데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정년퇴임을 하면서 스캔해 둔 제 컴퓨터 속의 책들을 꺼내봤지만 제가 읽고 만지작거리던 책 속에도 없더군요.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봤지요. 다행히 성공 전략을 소개하는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하지만 모두가 ‘자신감을 가져라’, ‘너만의 브랜드를 창조하라’, ‘독창적 스타일을 가꾸어라’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협조가 아니라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한 전략이고, 이대로 길렀다가는 시기와 질투의 세상을 만들고, 우리 금쪽들도 그 속에서 시달리다가 아주 못된 놈이 될 것 같데요.

‘그래도’라며 내 자식만은 모두를 이기도록 만들고 싶은 분들은 ‘평생 옆지기’에게 무엇에 끌려 결혼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결혼보다 더 이기적인 선택은 없으니까요. 그래 용모? 학벌? 돈이 많아서?

제가 작년 9월 말 하늘나라 들판으로 산책을 가 안 돌아오는 집사람과 결혼한 것은 다실이나 음식점에서 내가 앉아야 따라 앉는 매너와, 좀 맛있게 보이는 음식이나 다과 접시를 제 앞으로 밀어놓는 배려와, 이야기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는 미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자주 집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 사람도 저처럼 자기를 위해줄 사람을 원했는데 상남자 노릇만 해왔다는 미안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며칠 동안 경쟁이 아니라 협조와 사랑을 우선으로 기르는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 속을 헤맸지요. 며칠 동안 헤매다가 아주 놀라운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미 컬럼비아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암스테르담, 파리, 로마 대학에서 성형외과 의사와 교수로 근무한 맥스웰 몰츠(M, Maltz, 1899∼1975)가 제시한 ‘성공의 법칙’입니다.

그가 ‘사이코 사이버네틱스(Psycho Cybernetics)’(1960)를 통해 주장한 것을 요약하면, 상담이나 수술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잠재의식 속에 자기 외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재의식 속에 담긴 인식들은 ‘상상’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동으로 작동해 수술을 원한다면서 그런 생각을 담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프로이트(S. Freud, 1856~1939)가 설정한 잠재의식의 기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 금쪽들을 잘 기르려면 되도록 일찍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 속에 입력시켜 두고,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자동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지난 정권에서 도저히 그러지 말아야 할 분들이 아빠 찬스를 쓴 것이 떠오르면서 협력과 공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떠오르데요.

늴리리야 늴리리야 콧노래가 흘러나오데요. 자료를 찾으려고 열어놨던 인터넷과 컴퓨터 폴더를 닫기 시작했지요. 컴퓨터 모니터와 자판 사이 아주 예쁜 꼬마와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빠가 “넌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고 묻고, 꼬마가 뭐라고 대답하자 아빠가 빙그레 웃으면서 “뭐가 그게 좋아서 그러는데?” 다시 묻고…….

어느새 그 꼬마는 중학생으로, 다시 고등학생으로 바뀌고, 아빠는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대학을 가려니?” 묻고, “그 대학에 가려면 너희 학교에서 몇 등까지 해야 되는지 진학담당 선생님께 여쭤봐라”라고 귀띔해 주고, 그래서 그 소년은 학년별, 학기별, 월별 목표와 시간표를 짜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달은 아빠가 등을 도닥이면서 “여보! 우리 자식의 꿈이 이뤄지려는가 보다, 고기 몇 근 사다가 가족 파티를 열자”라고 아내에게 부탁하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폴더들을 닫다가 아주 끔찍한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한꺼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해치우려는 제 ‘멀티-태스킹(multi-tasking) 습관’ 때문에. 그러니까 제 컴퓨터 속 ‘작은 도서관’을 뒤적거리다가 잘못 배치한 전자책 파일 300~400개를 모아둔 폴더를 날려버린 겁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황해서 이 폴더 저 폴더 헤매다가 이번 연재의 초고를 다시 날려버렸습니다.

울고 싶데요.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담아두면 안 된다는 폴츠의 조언이 떠올라 억지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PC 톡으로 인천에 사는 셋째 동생에게 원격 시스템으로 삭제한 파일을 복구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러나 너무 헤집고 다녀 복구가 안 된다고 하데요. 할 수 없이 편집부에 사정을 알렸지요. 이번 연재가 한 주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쓰기 시작했지요. 파일들을 날렸다는 잠재의식 때문이지, 복구하려다가 너무 지쳤기 때문인지 줄줄이 오타가 나고, 문장도 엉망진창인 겁니다. 그리고 그걸 바로잡다가 다시 쓴 원고들을 또 날려버리고….

그러다가 엊저녁에야 겨우 남들이 시기하지 않고 날 좋아하게 만들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협력에서 그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대인들의 협력은 이해관계가 맞을 때까지만 유지하고, 그 일이 끝나는 순간부터 다시 경쟁자로 바뀌는 게 상례라서.

하지만 사랑은 부담스러울 것 같데요. 그래서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큰 부담이 안 되는 것은 양보하고, 서로가 정반대를 원할 경우에는 웃으면서 말하되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는 어법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절대로 지도자가 좋은 건 아니지만 아이가 원하면 어떤 능력을 길러줘야 하는가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누구나 ‘창의력(creativity)’이 풍부한 사람을 꼽더군요. 그래서 다시 창의력이 뭔가,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기를 수 있나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대부분의 자료들은 제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망상이라며 금기시했던 상상력을 꼽더군요. 아마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상상력(L' Imagination’(1936)을 펴낸 뒤부터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던 종래의 이원론(二元論)에서 벗어나, 이들은 상상을 통해 연결되고, 그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을 ‘또 다른 실재(實在)’로 보는 관점이 방향을 바꿔놓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맥스웰 몰츠(1899∼1975, 왼쪽)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맥스웰 몰츠(1899∼1975, 왼쪽)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하지만, 아직 정립된 이론이 아니라서 적용하기가 어렵데요. 그래서 ‘문학연구방법론’을 쓰면서 제가 설정한 다섯 가지 유형을 기준 삼아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누구나 먼저 꼽는 것은 ‘재생적(reproductive)상상력’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극을 받으면 그 감각적 경험은 ‘잔상(殘像)’으로 남고, 시간이 흐르면 추상적인 ‘기억(memory)’으로 바뀌고, 그를 회생시켜 원래 자극처럼 바꾸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연합적(associative) 상상력’을 꼽습니다. 명칭 그대로 몇 개의 재생적 상상력을 합쳐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면 전혀 다른 가정으로 바뀌듯이.

‘창조적(Creative) 상상력’은 실재의 자극을 접어두고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직관적(intuition) 상상력’은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떠올리는 것으로, 미국의 생물학자 윌슨(E. O. Wilson, 1929~2021)이 주장한, 서로 다른 것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묶어 사유하고 분석하고 추론하는 것은 ‘통섭(統攝)’으로 꼽았습니다. 통섭은 최재천(崔在天, 1954~)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윌슨의 ‘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이런 상상력들을 만드는 방법은 명칭이 암시하는 대로 하면 될 것 같아 이들을 키울 방법을 생각해봤지요. 기존 자료의 대부분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생각해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두뇌의 ‘경제 원칙’을 무시하는 권유더군요. 앞에서 소개한 몰츠가 ‘실재’와 ‘상상’을 구분할 수 있는데도 잠재의식이 이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작동시킨다고 주장한 것도, 제가 전자책 파일들을 날린 것도 되도록 두뇌활동을 줄이려는 욕망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자동적 반응을 막을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아주 문득 어린 소녀가 장미를 안고 가다가 시궁창에 떨어뜨린 경우를 떠올렸습니다. 지나가다 본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고 상상하겠지요.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남자한테 받아 일부러 버린 것이라고 상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잘못해서 떨어뜨리고 건질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의 표정을 상상하고….

그래서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상황적 배경을 바꿔보도록 유도하고, 그래도 새롭지 않으면 그걸 바라보는 주체의 성과 연령 사회적 계층을 바꿔 보고, 또 심리적 거리도 ‘호감’, ‘비호감’, ‘중립’의 입장에서 바꿔보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어느 경우든 “이렇게 해”라는 지시적 표현과 “겨우 그 정도야?”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하지 말고. “좋았어. 그런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쉽지만 못 다한 말은 다음 호에 끼워 넣을게요.

다음 호 주제는 이렇게 기른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논의해볼까 합니다. 안녕, 안녕, 두 주 뒤에 만나요.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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