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연극상 받은 박지아의 삶과 연기

 나이 지긋한 진짜 해녀인 줄 알았는데... 40대 젊은 배우 박지아. 사진 구혜정 기자.
 나이 지긋한 진짜 해녀인 줄 알았는데... 40대 젊은 배우 박지아. 사진 구혜정 기자.

“제 인생 첫 작품이 '혈맥'이었는데 북한말 쓰는 노역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잘하고 싶어서 내가 쉰 살이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연기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통통 튄다. TV에서와는 달리 피부도 하얗고, 제주 말씨는 찾아볼 수 없다. 인기 드라마 작가 노희경이 쓰고, 스타 배우들이 등장하는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목소리 크고 영옥이(한지민 역)를 못살게 굴던 해녀 ‘혜자’ 역을 맡은 배우 박지아(46)다. 

누가 쓴 드라마인지도 모르고 간 오디션
박지아가 이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경에는 4년 전 찍은 단편영화 ‘구례 베이커리’가 작용했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나이 많은 연기를 해냈다.
“영화에서 경운기 끌고 농사짓는 촌부로 등장했어요. 제가 준비 중인 드라마 ‘링크: 먹고 사랑하라, 죽이게’를 연출하는 홍종찬 감독님이 영화를 보셨나 봐요. ‘우리들의 블루스’ 김규태 감독님이 마침 해녀 역을 찾고 계셨고, 저를 추천하셨답니다. 오디션 연락 받았을 때 사실 노희경 작가님이 쓴 작품인 줄도 몰랐어요. 마음 내려놓고 편하게 갔죠.”

평소처럼(?) 화장 하나 안 하고, 연습복 차림으로 오디션 현장을 찾은 박지아를 보자마자 담당 피디의 첫마디가 “내가 생각했던 혜자의 머리 스타일이네”였다.
“기분 좀 나빴죠(웃음). 제가 어때 보였기에 해녀 머리 스타일인가 싶었어요. 연극 경험 물어보시고, 연기해 보라고 해서 하니까 칭찬도 해주시고요. 아주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저도 사실 이런 얘기 안 하는데 무슨 마음에서인지 대뜸 ‘저 시켜주세요’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느낌이 좋다 싶었는데 다음 날 연락해 왔고, 드라마 팀에 합류했습니다. 연극 쪽에 오래 있어서 노희경 작가님의 명성을 잘 몰랐어요. 알고 갔다면 떨렸을 수도 있었겠죠.” 

 스무살 떄부터 노역을 많이 하다보니 연기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박지아.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제주 해녀 혜자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 tvN  우리들의 블루스 홈페이지 영상 캡처.
 스무살 떄부터 노역을 많이 하다보니 연기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박지아.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제주 해녀 혜자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 tvN  우리들의 블루스 홈페이지 영상 캡처.

감독의 눈은 정확했다. 드라마 속 박지아는 연기라기보다 실제로 제주 해녀가 나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드라마 초반 배우 한지민이 연기하는 영옥을 구박하다가도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영옥의 안타까운 사정을 이해하고 보듬는 모습도 흐트러짐 없이 연기로 담아냈다.  
“원래 더 나이 많은 배우를 쓰려고 했대요. 제가 이 역할을 하게 돼서 나이 많지 않게 연기해도 된다고 감독님이 그러셨는데, 고두심 선생님 바로 아래 상군해녀(호흡이 길고, 깊은 바다까지 잠수하는 경력있는 해녀)거든요. 제 나이에 맞추자니 영옥이랑 너무 가깝고요. 그러니 어느 정도 나잇대는 맞춰야 했어요.”

해녀 자태와 성격만큼 박지아의 제주말도 일품이다. 제주 방언이 생소할 텐데 현지인처럼 입에서 술술 나와 귀에 꽂힌다.
“고향이 전라도라서 전라도 억양이 제 말투에 좀 있어요. 제주에 ‘무사’, ‘혼저혼저 오라게’ 이런 말을 전라도 방언에서 ‘거시기’가 들어가는 구간에서 했어요. 제주억양이라는 걸 저는 잘 몰라요. 쓰여 있는 대로 했는데 제주 말 같다고 해서 놀랐어요.” 
제주 해녀 역할이다 보니 제주 말은 당연하고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도 소화해야 했다. 재미난 것은 수영을 좋아하는데 잠수를 특히 더 좋아한다고. 언젠가 해녀 역을 할 줄 알고 태어난 건 아닐까 싶다. 
“취미가 잠수였어요. 정말 신기하죠. 수영장 가면 사람들은 수영하는데 저는 바로 잠수해서 바닥끝까지 가는 걸 주로 했어요. 잡념이 생길 때 바닷속이나 심해를 생각하면서 명상했어요.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도 그다지 많이 힘들지 않았어요. 전문 다이버 대역도 준비하고 있었고요.”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하냐고 물으니 긴가민가하지만 길을 지나다 보면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극 중에서는 할머니 역에 가까운 사람이 실제로 보면 너무 젊으니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연극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윤미현 작 / 최용훈 연출)'의 한 장면, 이 작품으로 제54회 동아연극상 유인촌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사진 국립극단 공식 트위터.
 연극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윤미현 작 / 최용훈 연출)'의 한 장면, 이 작품으로 제54회 동아연극상 유인촌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사진 국립극단 공식 트위터.

연극, 운명처럼 만나다
본인을 생각보다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박지아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운명처럼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 모든 관심은 연극 하나로 모이게 됐다. 
“칠판에 연극반 모집이라고 선배님이 써놓았는데, 영화처럼 주변은 정지가 되고 딱 그것만 보이더라고요. 연극반에 가입하겠다고 칠판 앞으로 가서 제 이름을 썼어요. 연극반 들어가자마자 오디션을 봤어요. 제가 다리를 꼬면서 연기를 했습니다. 많이 놀랐어요. 미술이나 노래에도 소질이 있었어요. 성악을 해보라는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고요. 불붙 듯이 연기에 빠졌습니다. 연극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죠.”

인생길에서 만난 좋은 스승
불안한 20대를 보냈다는 박지아는 좋은 스승을 만나 용기 내서 성장하고 무대에 설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스물일곱 살에 뮤지컬 블루사이공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극단 모시는사람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연출하고 희곡 쓰시는 김정숙 작가님이 대표님으로 계신 곳인데 저를 이해해주고 새롭게 모습을 찾게 해준 분이셨어요. 일주일 정도 제가 연기하는 걸 보시더니 김 대표님이 “너 왜 연기할 때 눈을 잘 못 마주치니?”라고 하셨어요.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저는 그 상황을 먼저 모면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너무 솔직한 말이 나왔어요. “자신이 없어요”라고요. 대표님은 “자신감이 없어? 그 자신감은 오늘 없어도 내일 생길 수도 있고, 네가 연습하다가 무대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생길 수도 있어”라고 하시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해주셨어요. 뭔가 뻥 뚫린 느낌이 나더라고요. 그전까지 제가 하는 소통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주는 스승을 만난 박지아. 드디어 소통할 수 있는 진정한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스스로 개척해왔던 연기 방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승을 만나고 인정받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연극 '심청전을 짓다(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의 한 장면. 사진 Aejin Kwoun,극단 모시는사람들.
 연극 '심청전을 짓다(김정숙 작/ 권호성 연출)'의 한 장면. 사진 Aejin Kwoun,극단 모시는사람들.

'대한민국 연극'을 만나다
배우 박지아를 말할 때 국립극단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시청자들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박지아는 국립극단 시즌 단원으로 3년간 활동하면서 연기 경력에 정점을 찍기도 했다. 
“국립극단이 전속 단원제를 폐지하고 시즌 단원으로 전환한 첫해에 오디션을 봤습니다. 오디션 때  한 심사위원이 국립극단에는 왜 들어오냐고 물으셨어요. 내년에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되는데 공부하고 싶고, 40대를 끌고 갈 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벚꽃 동산’ 대사를 낭독해보라기에 제가 느끼는대로 중성적으로 읽었어요. 알고 보니 여주인공 대사더라고요. 그걸 심사위원들께서 잘 보신 것 같아요. 전전긍긍하지 않고 모든 중요한 순간에 차분한 마음으로 집중했어요.”
국립극단 시즌 단원이 되고 연극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국립극단의 상황이 급작스럽게 전환되는 과정에서 안팎으로 잡음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연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큰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정부 기관 단체에서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가짐도 좀 달라졌습니다. 매년 시즌 단원으로 들어가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애국가’도 불러요. 예술감독님이 ‘대한민국 연극을 살리는 마음으로 연극을 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납니다. 나 자신만 생각했던 개념이 국립에 있으면서 조금 더 확대됐습니다. 한국연극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도 하게 됐고요.”

국립극단 시즌 단원에 대한 정책이 바뀌면서 3년 동안 활동했던 배우는 연임할 수 없게 됐고, 또다른 연극 인생으로 발을 디뎌야만 했다.
“3년이나 국립극단 생활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니 좀 무섭더라고요. 근데 그때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라는 작품에서 조끼 할머니라고 80에 가까운 나이를 연기했어요. 오징어게임에 나오신 오영수 선생님도 출연하셨는데, 따라가느라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40대에 신인상은 너무하지 않냐고요.”

국립의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의 삶을 걱정했는데 동아연극상 덕분인지 쉴 틈 없이 작품이 들어왔고, 연극에 열중할 수 있었다. 
“1년에 여섯 개에서 일곱 개 작품은 한 것 같아요. 작품을 너무 많이 해서 건강에 무리가 왔어요. 몸이 너무 안 좋았을 때 코로나가 발생했어요. 진행하던 연극이 무산되고 결국 강제로 쉬었는데 컨디션이 좋아지더라고요. 코로나로 힘들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회복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역할이나 작품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새로운 드라마 대본을 보고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는 딱 그 지점이 너무 행복합니다.” 사진 구헤정 기자.
 “역할이나 작품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새로운 드라마 대본을 보고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는 딱 그 지점이 너무 행복합니다.” 사진 구혜정 기자.

행복한 배우가 되고 싶다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고 물으니 “지금 작품 가릴 때가 아니다”라며 호탕하게 웃는 박지아. 그래도 혹시나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도 그렇지만 필력 좋은 작가님의 작품은 언제든 해보고 싶어요. 김수현 선생님의 작품도 좋아해요. 배우라면 누구든지 좋은 작품하고 싶어 하잖아요.”
박지아는 자신의 인생도, 연기하는 삶도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아냈으면 한다. 
“배우는 천성적으로 역할이나 작품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새로운 드라마 대본을 보고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는 딱 그 지점을 너무 좋아합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배우일 줄 알았더니 이제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온 샛별 배우 박지아! 그녀의 행복한 연기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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