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숙 논설위원, 동의대 융합부품소재 핵심연구지원센터 부소장

 원미숙 논설위원
 원미숙 논설위원

우리나라 정부가 여성 과학기술인력에 관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된 시기는 2000년대 초이다. 2002년에 이루어진 여성과학기술인(이하 여과기인) 지원과 육성에 관한 정부의 정책은 과학기술진흥법 제정(1967년) 시기에 비해 역사가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경제발전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국가 경제력의 핵심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1997년에 수립된 과학기술혁신 개발계획에는 과학기술 분야 인적 자원의 역외 유출 또는 이공계 이탈(기피) 현상이 광범위한 사회적· 정책적 이슈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저출산· 고령화, 고급 인적자원의 감소 가능성에 대한 대책 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적 화두였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특수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과학기술인력의 경우 남성만으로는 수급이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되면서, 여성과학기술인의 육성과 활용은 국가의 과학기술인력 확보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책프레임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타 분야의 경력자가 과학기술 산업으로 진출하는 데에는 긴 시간과 큰 비용이 수반되는 특성도 여과기인력에 집중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동시에 1995년 유엔 세계여성회의의 ‘북경선언’을 시작으로 젠더균형 문제가 정부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21세기 초반에는 과학기술 분야 여성에 대한 정책 아젠다를 형성하게 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여과기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온 네트워크의 목소리가 정책 수립에 작용하여 2002년에는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세계의 여과기인들이 부러워하는 이 법은 정부 주도의 여과기인 지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이를 근거로 2004년부터 5년 단위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지원 기본계획’이 수립돼 현재 제4차 기본계획(2019~2023)이 시행 중이다.

여과기인 육성·지원사업은 육성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이분화되어 다각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2011년, 전국 여성과학기술인 지원센터의 출범으로 여과기인 육성·지원사업이 통합되어 체계적· 효율적인 운영관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국가 정책사업의 독립성 강화 및 장기적 발전과 비전 실현을 위하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으로 기관명을 변경하고 공익재단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 조치에 힘입어 그동안 여과기인 지원 예산의 대폭적인 확대와 여학생의 이공계 유입이 증가되고, 20% 이상의 공공부문 여성연구원 확보 및 일·가정 양립 제도 활성화에도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성 다양성 확보를 위한 정책 추진 및 연구개발에서의 젠더혁신 개념도 도입되는 등 여과기인력의 양성 및 지원에 관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WISET의 ‘2020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채용·재직·승진목표제 추진 실적 및 활용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공계 대학 여학생 졸업생 수, 2020년 재직 중인 여과기인(5만 4201 명)과 정규직(3만 5087 명) 규모는 꾸준히 증가 중이다. 경력단계에 따른 성별 격차는 신규채용의 경우 43.8%이며, 승진과 보직 단계의 격차는 각각 66.8%와 76.0%로, 경력단계가 높아질수록 더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지난 20년간 여성과학기술인 채용목표제(30%) 등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여성 신규채용비와 여성 재직 비율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여과기인들의 경력 지속에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양성평등 조직문화, 일-가정 양립제도 등이 정착되지 않으면 채용비율 증가가 재직비율 증가로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늘어난 여과기인과 여과기 인재 규모와는 달리 일·생활의 균형, 이른바 '워라벨' 인프라 구축은 아직 미흡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과기인은 과학기술분야 전문가이다. 학력이 높고 지위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고강도 교육과 끊임없는 훈련,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연구,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을 지니는 여성들을 말한다. 여성은 과학기술 전문가이나 과학기술 분야 내에서의 비주류화로 사회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으며, 임신, 출산, 양육 그리고 종종 가사노동 등을 포함하는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생애주기에 따른 젠더장벽에 막혀 있다.

따라서 여과기인 지원정책은 ‘과학기술인재 정책’인 동시에 ‘여성 정책’, 그리고 ‘노동 정책’이라는 다면적 관점에서 추진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하여야 한다. 여과기인의 역량 강화와 함께, 지속 가능한 일·생활 균형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우수인력의 경력 단절 예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오랜 기간과 예산이 투자되어야 하는 과학기술인력의 안정적 확보는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 및 사회적 가치 실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혼, 취업, 출산, 육아를 병행했던 1970, 80년대에 입문한 여과기인들은 대부분 슈퍼우먼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육아휴직은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과학기술 분야의 정규직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 출산 후 한 달이 못 되어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일에 복귀한 기억이 생생하다.

더 이상 전문성을 가진 우수 여과기인이 슈퍼우먼이 되기를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핵가족화로 인해 이웃과 가족에 의한 공동육아나 가사에 도움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임신-출산-육아 등에 의한 휴직 후 복귀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 흐름을 따르고 경쟁력을 확보하여 지속성장 가능한 재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제는 사회가 우수한 전문여성들이 일할 수 있도록 일·생활 균형 인프라를 제공해야만 한다. 정부가 지난 4월, 2022년도 여과기인 지원사업에 예산 251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하였다. 전년 대비 17.5%가 증가한 금액으로, 환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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