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철학부터 마련합시다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저는 요즈음 뉴스를 볼 때마다 아주 엉뚱한 의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광복 이래 채택해온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과연 우리에게 적합한가라는. TV를 켤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여야 정치인들의 ‘내로남불’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니, 회의에 시달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광복 후 77년 동안 이 나라를 이끌어온 12명의 대통령이 줄줄이 떠오르면서 이러다가는 눈물로 이뤄온 이 나라가 ‘폭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제 나름대로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새로 취임한 윤석열(尹錫悅, 1960∼ ) 대통령을 위해서는 당신만은 역사 속에 길이 기억되는 행복한 대통령이 되시라고, 양산으로 떠난 문재인(文在寅, 1953∼ ) 대통령께는 마음을 비우고 잘 버티시라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85세에 하와이로 추방돼 고국쪽 요양원 유리창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셨다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지만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아내를 잃고 밤마다 술을 마시다가 자식같이 아끼던 사람의 총알에 떠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 한 짓을 생각하면 당해도 싼 전두환(全斗煥, 1931∼2021), 노태우(盧泰愚, 1932~2021) 대통령, 본인들은 괜찮았지만 자식들을 형무소에 보낸 김영삼(金泳三, 1927~2015), 김대중(金大中, 1924~2009) 대통령,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 지으신 노무현(盧武鉉, 1946~2009) 대통령, 80 노인으로 아직도 옥중에 계신 이명박(李明博, 1941~ ) 대통령과 선거 전략 때문에 겨우 사면을 받은 박근혜(朴槿惠, 1952~ ) 대통령께 어디 계시든지 분노를 풀고 이제 정말로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엊그제부터는 이런 비극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치학자도 아니면서 이제까지 우리가 채택해온 민주주의 체제가 적합한가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근대 이전까지 동양과 서양 두 지역의 주업(主業)과 언어(言語)에 의해 형성된 문화적 유전자의 지향성(志向性)을 살펴보는 작업입니다. 이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탄생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들이고, 누구나 그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지역을 떠나도 같거나 비슷한 지역으로 떠나고.

이런 기준으로 묶어보니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지역은 ‘유목(遊牧)과 화자(話者) 지향형의 언어’, 이를 받아들인 우리는 ‘농경(農耕)과 청자(聽者) 지향형의 언어’가 핵심 유전자더군요. 화자 지향형의 언어는 지난 연재에서 말씀드렸지만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주어와 서술어를 먼저 말하고 나머지는 뒤에 말하는 어족(語族)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청자 지향형은 생각하며 듣도록 주어는 되도록 생략하고, 서술어는 맨 뒤에 이야기하는 어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런 조건만 가지고 그 많은 문화지리학자들이 풀지 못했던 사회 심리현상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겠느냐고요? 그럼 확인해보실래요? 우선 유목 국가인 유럽 각국 수도의 인구수를 추정해보고 인터넷으로 찾아보세요. 우리와 비슷하거나 저쪽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지요? 하지만, 2012년 통계에 의하면 파리는 220만, 로마는 280만, 베를린은 350만, 아테네는 300만으로, 이 네 나라를 합쳐야 우리 서울 정도입니다.

너무 의외라서 믿기지 않으면 유목민족 여자들과 우리나라 여자들의 외출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유럽 여성들은 화려한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나설 거라면 또 틀렸습니다. 제가 가본 나라의 골목길 아줌마들은 모두 젖가슴이 훤히 보이는 헐렁한 티셔츠에 립스틱도 안 바르고 “하이” 하고 웃습니다. 사교 파티에 초대받은 여인들처럼 하고 나가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쪽이지요.

이런 차이 역시 농경민족들은 모여서 살고, 유목민족들은 초원 한복판이나 높은 산꼭대기에 외딴집을 짓고 살며 형성된 유전자가 무의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세계관과 가치관과 생활 태도로 이어집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유목민족들은 신본적(神本的)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객관적인 반면에, 농경민족들은 인본적(人本的)이고 공동체 중심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신본적이라는 건 세계적인 종교 모두가 유목 지역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비롯해, 그들의 신화와 전설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신인 제우스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는 장남이 아니라 막내아들이고, 천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 아버지들과 싸웠고, 여신이나 님프들을 쫓아다니며 무수한 자식들을 낳습니다.

 '제우스와 헤라'. 이탈리아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1560~1609 작.
 '제우스와 헤라'. 이탈리아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1560~1609 작.

또 기독교 신화도 내용만 다를 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렇게 만든 아담과 이브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다시 그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의 심판’, ‘물의 심판’을 내리시고…. 그 옆 아랍 지역의 이슬람교의 경우는 예수님 자리에 마호메트가 앉아 있을 뿐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농경문화권의 공식적인 기록엔 천지 창조신화는 없습니다. 도교에 나오는 ‘반고(盤古)’ 이야기와 후한 허신(許愼, 58?~ 47?)이 펴낸 ‘설문해자(設文解字)’(AD. 8)의 ‘복희(伏羲)와 여아(女媧)’ 이야기가 있을 뿐. 그러나 서구의 신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반고는 2개의 뿔과 2개의 어금니를 가지고 있으며, 온몸에 털이 나고, 나뭇잎으로 엮은 옷을 입은 난쟁이입니다.

  '복희와 여와'.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복희와 여와'.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또 ‘복희와 여와’ 이야기는 반고 이야기의 후속편으로, 여와가 6일 동안 이 세상과 가축들을 만들고, 7일째 되는 날에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8일부터 10일까지 곡식들을 만들고, 자기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멸종될까 봐 계속 만들다가 결혼제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건국신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BC 23세기경에 탄생한 단군(檀君)신화는 천제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세상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길 원하는 곰[熊女]과 결혼해서 단군(檀君)을 낳고, 그가 조선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BC 37년에 탄생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압록강 수신(水神)의 딸 유화(柳花)가 천신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사통을 해 주몽(朱蒙)을 낳고, 그가 떠나자 부여 왕한테 재가했다가 본처 소생들이 핍박해 도망 나와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고, 신라 가야 탐라국의 건국신화는 시조들이 알이나 땅에서 태어납니다. 농경민족의 신들은 서구와 달리 인간을 돕기 위한 존재인 동시에 때가 되면 죽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와 같이 두 문화권의 신화가 전혀 다른 것은 역시 자연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목 지역은 풍화작용이 덜 된 장년기 산들과 사력질(砂礫質) 들판의 연속입니다. 그런 곳으로 가축을 끌고 지나가다가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를 만나면 공포스러워 신의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농경지역의 산들은 노년기 산들이고, 토양 역시 점토질인 데다가 평생 머물러 살던 마을의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겪는 변화라서 덜 두렵거니와, 날씨가 개면 오히려 농사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반갑겠지요.

이와 같이 가축을 몰고 이리저리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불편을 줄이기 위해 방해가 되는 것들을 극복해야 하겠지요. 그로 인해 ‘힘’과 ‘능력’과 ‘객관적 판단’을 중시하게 되고. 하지만 함부로 힘을 쓰면 사회가 혼란에 빠지므로 “악법도 국법이라면 따라야 한다”며 법과 질서를 강조해왔습니다. 저들이 근대 이전까지 무술이 능한 사람을 ‘기사(Knight)’, 그 뒤 능력이 있으면서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을 ‘신사(Gentlemen)’라며 존경하고, 규칙을 지키면 약자를 살해해도 무방한 결투 제도를 허용해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평생 한 지역에서 머물러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고, 이웃들과 화합해야 합니다. 논농사는 여러 사람들이 서로 도와야 하는 업종으로 주변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면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인내와 겸손을 미덕으로 삼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군자’, 이를 초월하는 사람을 ‘성인’이라며 추앙하고,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공동의 윤리로 내세워왔습니다.

여기까지 추론해온 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강이나 오륜은 민주주의에서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에 어긋나고,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은 이와 같이 상반된 가치관을 사회제도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을 때는 민주를 내세우고, 그걸 피하고 싶을 때는 ‘국민의 입장’에서라는 전통적인 이념을 내세워 내로남불의 천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을 고심했지요. 그러다가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적인 질서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준에 의해, 사적인 관계는 삼강과 오륜에 의한 질서를 중시해야 한다는. 그리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은 교육부가 맡아 만드시라고 부탁드리기로 하고.

이제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새 정부가 ‘5·18 광주 혁명’의 의미를 헌법 전문(前文)에 끼워 넣겠다고 하시던데,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실 때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라는 한 구절만 더 끼워 넣어주시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헌법 전문을 살펴보니까 건국의 역사와 민주 이념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민 철학을 외면하고 있어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사랑과 협동이 우리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끊임없이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아, 그럼 두 주 후에 뵙겠습니다. 그때도 역시 교육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로 해요. 방향을 약간 바꿔서 가정교육 문제를….

사랑해요. 안녕!유월 초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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