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지난 8일 김지하 시인이 영원히 우리들 곁을 떠났다. 1960~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 고인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고인은 반독재 만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펜으로 맞선 투사였다. 실천적 문인으로 민주화를 위해 투옥이 거듭된 삶을 산 저항 시인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조사(6·3사태), 오적(五賊), 분씨물어(糞氏物語), 타는 목마름으로, 새’ 등등-. 고인이 남긴 역작들이다. 특히 국가권력의 부정부패를 질타한 담시 ‘오적’과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새’ 같은 절창은 젊은이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민주화 시위에 나서게 만든 격문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고인은 4회에 걸쳐 7년 가까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사형 선고까지 받은 고인은 노벨문학상, 평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민주화 투사가 운동권과 멀어졌다. 1991년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때문이다. 고인은 ‘죽음의 굿판 걷어 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을 비판했다. 고인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생명 존중을 강조했다. 당시 대학가는 반독재 항거의 일환으로 분신자살이 잇따르고 있었다. 고인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칼럼을 썼지만 이는 민주화 운동의 투쟁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계기가 됐다. 고인은 이로 인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진보진영은 민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 같은 진보 진영이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선봉에 섰던 고인의 추모마저 외면했다. 고인의 빈소에는 민주당 586인사들의 모습도, 조화도 보이지 않았다. 성추행 혐의로 자살한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추모는 그렇게 대대적으로 했으면서. 고인의 운동권 비판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한 앙금이 그 원인이다. 고인을 변절자로 본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투사의 마지막 길까지 모른 체한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들과 노선이 달라지면 모두 변절자가 되는 것인가? 아무리 민주화에 공이 커도-.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보언론이라고 자부하는 한겨레신문은 지난 8일 “독재에 맞섰던 ‘투사시인’ 김지하, 끝내 변절 오명은 벗지 못한 채…”라는 제목으로 고인의 부음을 알렸다. 보수 진보 언론을 막론하고 제목에 변절이라는 말을 붙인 신문은 한겨레가 유일했다. 한겨레는 고인 관련 기사도 겨우 4건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같은 진영의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도 대동소이하다.

반면 보수언론은 고인이 보수 진영이 칭송하는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었지만 그의 작품이나 행적을 폄하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독재에 맞서다 사형선고…펜으로 싸운 저항시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세계와 민주화 투쟁을 다뤘다. 고인 관련 기사도 조선이 15건, 동아일보 13건, 중앙일보 9건(이상 인터넷판 기준)으로 진보언론들을 양적으로도 압도했다. 보수언론들도 고인의 가치관 변화를 다뤘으나 그의 행적을 변절로 폄하하지 않았다. “고인의 작품세계를 극단적인 변화의 과정이나 변절로 말하는 세간의 평이 있지만 이것은 변절이 아니라 변화이고 발전"이라는 홍용희 교수(경희대)의 글로 변절 시비를 다뤘다.

변절이란 지조나 절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하거나, 강압에 굴복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인의 언행 변화를 변절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가치관의 변화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감옥에서 깨친 생명사상을 담은 시집 ‘애린’, ‘흰 그늘’ 등은 그의 이 같은 사상적 편린을 보여준다. 고인은 목숨을 구하려고 전향서를 쓴 적도, 자리를 탐한 적도 없었다. 생명 사상을 천착(穿鑿), 생각이 바뀌고, 운동권과 궤를 같이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운동권의 변절론을 의식, “김지하와 함께 한반도의 해방과 민주, 생명평화를 꿈꿨던 분들은 부디 그의 명복을 빌어 주시길 바란다. 설혹 마음에 안 들더라도 고인이 떠나는 길에는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푸시길 바란다”고 추모사에서 당부했다. 이런 게 진정한 화해이자 가는 이를 보내는 예의다. 모든 것을 흑백이라는 편협한 잣대로 재단하면 세상은 오직 증오의 대결만 남게 된다.

고 이어령 선생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지음)에서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며 모든 것을 흑백의 잣대로 보려 하는 세상을 아쉬워했다. 고인은 이어 “절대 불변의 신념에 집착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신념에 목숨을 걸면 위험하다고도 했다. 나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 800만 명을 죽였다는 경구(警句)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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