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떠난 선생을 기리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입구.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입구.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오래전에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영화 하나가 있다.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죽기 전에 영상을 하나 남기고 떠났다. 익살스러운 표정이었고, 유머가 넘쳤고,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어령 선생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짧은 영상 인사를 보다가 그때 그 영화가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후대를 향한 응원이, 후회 없이 떠나는 자의 여유가 있었다.

 지하 2층 전시실의 이어령 선생 흉상.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지하 2층 전시실의 이어령 선생 흉상.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큰 별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지난 2월 26일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이 시대 지성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향년 89세로 생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살아 있는 동안 1분 1초를 헛되이 쓰지 않았던 그. 7년 전 췌장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의 연명 치료 대신 펜을 들어 글을 쓰고, 생애 끝까지 수많은 족적을 남겨 놓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람들 앞에 꼿꼿하게 서서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며 준비하다 떠난 전시전인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 이어령 긴예술전시 장예전(長藝展)’이 이어령 선생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 있는 영인문학관(종로구 평창동‧관장 강인숙)에서 열리고 있다. 지하 1, 2층에 걸쳐 이어령 선생의 생애와 업적, 후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만나며 그를 기리고 추모하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의 정성 가득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김병종 화백이 그린 닭 모형이 관람객을 곳곳에서 맞이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김병종 화백이 그린 닭 모형이 관람객을 곳곳에서 맞이한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전시는 지하 2층에서 시작해 지하 1층으로 올라가며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을 그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시작해 곳곳에서 화가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닭을 만날 수 있다. 닭띠인 이어령 선생은 ‘새벽에 외롭게 외치는 소리’로 닭의 상징성을 자주 언급했다. 지하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로 이어령 선생의 흉상과 만나게 된다. 오른쪽으로 나무 구조물에 광목 휘장을 내리고, 닭이 길을 안내하듯 빠끔히 전시실 안으로 안내하는 길을 내놓았다.  

지하 1층 전시실 내부.  오른쪽 광목 휘장 뒤로 이어령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지하 1층 전시실 내부.  오른쪽 광목 휘장 뒤로 이어령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지하 2층 전시실은 ‘일상의 기호학’이라는 주제로 이어령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돌잡이로 하고많은 것 중에 책을 집어 들었다는 어린 이어령. 그때의 선택이 인생의 큰 길을 결정지은 것 같다. 훗날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굴렁쇠는 이 선생의 추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선생 선친의 화로, 선생의 독서대, 자필 원고와 가족·결혼사진 등 열정적인 삶의 단면들을 만날 수 있다. 1988년 ‘제24회 하계 서울올림픽’ 당시 개·폐막식 대본 사례집과 저서 등도 전시돼 있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굴렁쇠 소년의 등장은 홀로그램 작품 ‘정적’으로 재생했다. 평소 이어령의 서재로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서는 살아생전 모습이 담긴 방송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이어 지하 1층에는 이우환, 백남준, 임옥상 등 이 선생의 소장품이 소개돼 있다. 오른쪽으로 광목 휘장을 넘어 들어가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고 이름 붙인 이 선생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김아타 작가가 찍은 얼굴 사진과 함께 후대 DNA 연구를 위해 선생이 남긴 머리카락이 전용복 칠예장의 옻칠함에 담겨 있고, 성경책과 십자가, 지난해 정부로부터 받은 금관문화훈장이 놓여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느질로 만든 큰 원고지에 새긴 이 선생의 자필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평소 로비로 쓰였던 공간이다. 허성하 가든 디자이너가 만든 정원 좌식대 위에서는 조문객의 헌사가 만장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이어령 선생의 자필 글귀가 있는 지하 1층 전시실 앞 정원.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이어령 선생의 자필 글귀가 있는 지하 1층 전시실 앞 정원. 사진 권해솜 객원기자. 

정원은 푸른 잔디와 꽃향기와 햇살로 충만하다. 이 공간에서 선생은 사색을 즐기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진도 찍으면서 추억을 남기곤 했다. 최고 지성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느껴져 뭉클함이 밀려온다. 우리 시대 큰 선생님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영인문학관으로 가보시길. 
관람 정보 : 장예전 전시는 5월 14일까지이나 다음 기획전이 있기 전까지 한 달 정도 연장할 계획이다. 현재는 일, 월 휴관. 5월 17일부터는 주말(토, 일) 휴관으로 전환한다. 

생전 모습을 담은 TV 프로그램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이어령 선생. 사진 tvN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 방송캡처.
생전 모습을 담은 TV 프로그램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이어령 선생. 사진 tvN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 방송캡처.

※영인문학관은 이어령·강인숙 부부가 2001년에 설립한 문학박물관으로 우리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담은 곳이다. 문학관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영(령)’과 ‘인’을 따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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