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전' 음식점 오승열 씨의 사모곡

평양 잔치 요리 전문가 고 김봉화 씨의 장남 오승열 씨. 사진 구혜정 기자.
평양 잔치 요리 전문가 고 김봉화 씨의 장남 오승열 씨. 사진 구혜정 기자.

3년 전 이맘때였다.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젊은 마음으로 새 메뉴도 개발하고, 아들딸과 함께 행복하기를 바랐다. 평양 잔치 요리로 이름을 알린 김봉화 씨. 분홍빛 봄꽃처럼 곱게 내일을 기대하며 웃었지만, 지난 2월 14일 향년 85세로 영면에 들었다. 
벚꽃이 한창이던 4월 어느 날, 서울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으로 향했다. 살아생전 김봉화 씨가 운영하던 ‘봉화전’ 건물은 개발로 헐렸다. 작년 11월, 같은 골목 예전 식당이 있었던 가까운 자리에 ‘봉화전2’라는 이름으로 이전했다. 그곳에서 고인이 된 김봉화 씨의 장남 오승열(55) 씨를 만났다. 
제일기획의 광고기획자 출신인 오승열 씨는 평생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했던 전업주부 어머니를 봉화전 안주인으로 만든 사람이다. ‘김봉화의 이야기’란 뜻이 담긴 ‘봉화전(傳)’이라는 식당 이름, 간판 디자인, 봉화전 전체 스토리텔링이 오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현재는 봉화전 투자자이자 인공지능 전문기업 마인즈랩에서 마케팅을 총괄하는 부사장을 맡고 있다. 최근 어머니의 사십구재를 마친 뒤라 너무 어머니가 그립다고 오씨는 말했다.

“요즘 핸드폰은 자동으로 녹음이 되잖아요. 핸드폰 바꾼 지 얼마 안 되는데도 제가 어머니와 나눈 대화가 700통이 넘더라고요. 눈 뜨면 전화해서 엄마 일어나셨어요? 뭐 드셨어요. 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요. 하루에 많으면 열 번 이상도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처음으로 독립한 느낌이라고 했다. 식당 때문에도 어머니 생각을 많이 생각했고, 돈을 번다든지, 직급이 올라간다든지 그럴 때마다 자랑하고 싶었던 대상은 늘 어머니였다. 
“나이도 많고 가족도 있는데도 좋은 일이 생기면 늘 먼저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머니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평양요리 전문점 '봉화전'. 개업과 거의 동시에 매체에도 알려지며 급이 다른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어머니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평양요리 전문점 '봉화전'. 개업과 거의 동시에 매체에도 알려지며 급이 다른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봉화 이야기의 시작 
‘봉화전’은 평양 부잣집 아기씨로 자란 김봉화 씨가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요리를 내놓아 큰 사랑을 받은 곳이다. 식당 분위기는 고급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요리만큼은 고급 그 이상이라고 김봉화 씨는 늘 자신했다. 그 옛날 귀했을 법한 소고기와 계란 등을 푸짐하게 이용한 어복쟁반, 온반, 온면과 육전을 비롯한 다양한 전 요리는 지금껏 맛본 적 없는 신세계였다. 이 멋진 솜씨가 집안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저에게는 평양요리라기보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집밥이죠. 어머니는 본인의 요리를 평양 전통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젊은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시대의 것이라고 하셨어요.”

2011년 문을 연 봉화전은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였다. 인터넷 덕분에 입소문은 정말 빠르게 퍼졌다. 미식가로 유명한 가수 이현우가 자주 와 조용히 요리를 시켜먹고 갔다. tvN ‘수요미식회(종영 프로그램)’를 통해 알려지면서 매스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봉화전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오랜 단골손님은 남편과 자식들이었다. 

단짝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70을 훌쩍 넘긴 전업주부 어머니를 사회로 이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2002년 남편이 예순여섯 이른 나이에 지병으로 떠난 뒤 너무 외롭고 힘들어했다.
“사실은 어머니가 망가지실까 걱정되어서 식당 운영을 하실 수 있게 해드린 겁니다. 어머니가 끈 떨어지는 연처럼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중매로 결혼하던 시절, 연애 진하게 하고 결혼한 부부였던 김봉화 씨 부부. 홀로 남은 슬픔을 추스르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평생 가족만을 위해 사시던 분이라 가까운 친구가 없으셨어요. 주변 권유로 문화센터도 가봤지만 어울리지 못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혼자 유아 전문 매장에 갔다가 깜박하고 돈은 안 내고 물건만 가지고 나오신 거예요. 아마 제 아이의 돌 때쯤이었는데 손주 옷을 사려고 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마침 막내 남동생이 식당을 하겠다고 하더니 예전 봉화전이 있던 상가를 덥석 계약해버렸다.
“동생이 어머니께 요리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뭔가 자기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마련된 거죠. 정말 삼성동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고 조그마한 식당이었는데 잘됐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너무 바빴다. 식당 일을 벌인 동생은 얼마 안 가서 다른 일을 한다며 가버렸다. 동생과 공동투자로 시작했으나 오 씨가 단독 투자자가 됐다. 오 씨와 어머니 김봉화 씨 두 사람이 봉화전을 이끌어가게 됐다.
“장사가 기대 이상으로 잘됐을 뿐더러 어머니가 굉장히 즐거워하셨어요. 어머니가 정신없이 신경 써서 집중할 일이 생긴 거예요. 자식들도 다 컸고, 남편도 옆에 없으니 식당에만 몰입하면 됐습니다. 봉화전은 어머니의 모든 것이 돼 버렸습니다. 놀랄 정도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좋은 선자리 마다하고 연애 결혼에 골인한 오원근·김봉화 씨 부부의 생전 모습. 커리어우먼으로 큰 회사에 다녔던 김씨는 공군 사병이던 남편이 군 제대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은 물론 용돈까지 줘가며 진한 연애를 했다. 사진 오승열씨 제공
좋은 선자리 마다하고 연애 결혼에 골인한 오원근·김봉화 씨 부부의 생전 모습. 커리어우먼으로 큰 회사에 다녔던 김씨는 공군 사병이던 남편이 군 제대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은 물론 용돈까지 줘가며 진한 연애를 했다. 사진 오승열씨 제공

자식 말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예전에 한 통신사 광고를 보니까 우리나라 식당의 70%가 자식 이름이라더군요. 엄마가 뭔가 할 때는 자식을 걸고 한다고 해요. 제가 잘한 것 중의 하나가 이곳 이름을 반대로 어머니 이름으로 지은 겁니다.”
집에서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 한평생 살면서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도 크게 사람들 앞에 걸려본 적 없었다.
“제일기획에 다닐 때 직원들과도 식당 이름에 대해서 의견 나눈 적이 있었어요. 직원들이 어머니 이름이 ‘예스럽지만 재밌다’면서 식당 이름을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도 본인 이름이 계속 불리니까 엄청난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김봉화 씨는 살아생전에 “너무 즐겁고 재밌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 오 씨는 온종일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면서 어머니가 에너지를 많이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매일 일어나 시장에 가고,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을 맞는다는 생각으로 일하셨어요. 손님들이 먹다가 늦어지면 직원들 보내고 혼자서 마감할 때까지 기다리셨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되니 어머니가 ‘나는 아침만 있고, 밤은 없다’고 하셨어요. 힘들만도 할 텐데 어머니는 그 생활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시간
10년은 더 거뜬히 옆에 있을 것 같던 어머니였다. 어느 날 찾아온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어머니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렸다.

“뇌경색이라고 하니 동맥 혈관에 카메라를 넣어야 한다고 병원에서 그러더군요. 카메라가 끝까지 들어가려면 가장 두꺼운 동맥이 있는 허벅지에서 카메라를 넣어야 한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약속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이 경우 시술 뒤 허벅지에 대한 지혈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어머니에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화장실에 갈 일이 생기면 기저귀에 용변을 보라고도 했다.
“어머니가 누구한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세요. 혼자서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오셨답니다. 병원에서 빨리 오라고 해 갔더니 출혈이 심해 어머니 다리가 엄청나게 부풀어 있었어요. 의료진도 어머니 상황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일 이후 어머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됐다.
“어르신들 대퇴부나 다리 쪽을 다치시면 큰일 난다는 말이 맞아요. 운동을 못 하시니 살이 확 빠지시더라고요. 병원에 한 달 입원하고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겼어요. 서너 달은 계셨는데 어머니가 힘들어하셔서 결국 집으로 모셨습니다.”

집에 돌아오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니 식당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어머니.
“어머니 소원이 나가서 일하는 거였어요.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봉화전이 열린 이후 누구의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자신의 이름 ‘봉화’가 매일 수백 번씩 불렸다. 나이가 많건 적건 ‘봉화’를 불러주는 누군가의 목소리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맛있는 요리로 대접하고 싶었을 거라고 오 씨는 말했다.

어머니의 빈자리에는 정성 듬뿍 담긴 요리가 남아 있다. 어복쟁반과 녹두전,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자식에게 내줬을 법한 김봉화 스타일의 평양냉면 등을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어머니의 빈자리에는 정성 듬뿍 담긴 요리가 남아 있다. 어복쟁반과 녹두전,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자식에게 내줬을 법한 김봉화 스타일의 평양냉면 등을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1대 봉화전 대표와 마음 닿은 2대 대표
지금 ‘봉화전2’를 운영하는 이는 정승혜(49) 대표다. 요리를 좋아해 SNS에 손수 만든 음식을 올려놓기도 했다. 오 씨는 되도록 어머니와 비슷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랑으로 봉화전을 이끌어 가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아프시고 나서 SNS를 통해 봉화전 요리를 이어가실 분을 공모했습니다. 여동생은 가평에서 또 다른 봉화전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만두 공장을 차리느라, 이곳을 같이 운영하기 힘들었어요. 원래 식당이 있던 자리가 헐리면서 문을 닫으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죠. 어머니가 오랫동안 다니시던 길목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마침 지인이 소개해주시기도 했고, 요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지금 대표를 만났습니다. 인스타그램에 본인 요리를 올려놓으셨는데, 열정이 대단해 보였어요. 무엇보다 봉화전에 오시고 나서는 어머니가 지키고 싶어 하셨던 평양의 맛을 잘 따라주셨습니다.”

‘봉화전2’를 운영하는 정승혜 대표가 녹두전을 굽고 있다. 봉화전의 새 안주인으로 마음과 정성이 닿는 요리를 이어갈 것이다. 사진 구혜정 기자.
‘봉화전2’를 운영하는 정승혜 대표가 녹두전을 굽고 있다. 봉화전의 새 안주인으로 마음과 정성이 닿는 요리를 이어갈 것이다. 사진 구혜정 기자.

오 씨의 말에 따르면 “정 대표는 어머니 손맛을 내면서도 미술 전공자답게 요리에 미적 감각을 더했다”고 했다. 정 대표의 솜씨는 끊이지 않는 손님들이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평일 낮임에도 옆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며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인 음식 맛에 관해 이야기 하는 이들이 있었다.
“정 대표가 어머니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대신 제가 정 대표 요리를 선봬드렸어요. 우리 어머니가 칭찬을 잘 안 하시는 분이세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음식을 아주 정성스럽게 하신다. 맛있고, 간도 잘 맞는다’고 하셨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요리를 먹어왔던 오 씨에게도 정 대표의 요리는 위안이다.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어머니 손맛을 못 느끼겠거니 했다. 다행히 어머니 음식이 그리울 때 이곳으로 오면 되겠구나 싶었다고. 
“정말 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여기 말고는 어머니 음식을 먹을 곳이 없어요(웃음).”
 
배려하고 아끼는 삶을 산 어머니
나중에 알게 됐지만, 어머니의 라이프 스타일은 철저하고 또 현명했다. 자기 나름의 질서와 원칙을 만들었고, 주위 사람은 내 편으로 만드는 매력적인 사업가였다.
“어머니는 외주업체 사람들에게 굉장히 잘하셨어요. 일하시는 분들에게도 그렇고요. 식재료는 당일 결제했습니다. 매일 장사를 마칠 때쯤 은행에서 돈을 찾아와 일하시는 분들에게 일당을 드렸고요. 어머니가 멋쟁이시라 동대문시장 다니는 것 좋아하셨는데, 갈 때마다 상인들 것도 사서 시장 갈 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분들이 어머니 팬클럽이셨습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어머니를 반기셨습니다. 손님은 봉화 씨가 만든 음식을 맛보러 오셨고요. 한참 어린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명절이 되면 가사도우미를 불러 음식을 준비했으니 가족들이 명절 요리하는 수고와 스트레스를 덜었다. 듣고도 충격적인 한 가지는 65세 이상 노인이 되면 받는 경로 우대 교통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장사하면서 돈을 잘 버셨어요. 손녀는 물론이고 저에게도 용돈 주셨어요. 어머니 입장에서 나같이 큰아들에게도 용돈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기분 좋으셨을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는 경로 우대 교통카드도 받지 않으셨어요. 내가 돈을 버는데 왜 저걸 받느냐고 했어요. 자존심 상한다고 하셨어요.”

한창 봉화전에서 일할 때의 김봉화 씨. 돈 버는데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경로 우대 교통카드도 받지 않았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한창 봉화전에서 일할 때의 김봉화 씨. 돈 버는데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경로 우대 교통카드도 받지 않았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과장 같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오 씨. 죽으면 어머니를 만나겠지 생각한다.
“평양에 사실 때야 부유하셨지, 전쟁으로 피란 내려오다 할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정말 아무것도 없이 힘들게 사셨습니다. 그 숱한 사연을 속에 담고 살아온 세월이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품위를 놓치지 않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저랑 가락동 시장에 있는 큰 슈퍼에서 장 보는 꿈을 꾸셨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마지막까지도 나가서 일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지만, 가녀린 몸 털썩 떨구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해 작별을 고해야 했다.
“우리 어머니는 참 정직한 사람이셨습니다. 남의 신세 지는 거 좋아하지 않으셨고 오늘 이 순간 빚 없는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어머니 생각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100세까지는 있고 싶다던 그녀는 찬란했던 인생의 대서사시를 마무리했다. ‘봉화전’에 김봉화는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식 맛은 좋은 인연과 함께 쭉 이어져 전설이 돼가고 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 회사에서 만든 오승열 씨의 아바타를 보여주려고 기념촬영을 했다. 오 씨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한 뒤 회사에서 만든 오승열 씨의 아바타를 보여주려고 기념촬영을 했다. 오 씨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인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오승열 씨 제공.
"지금도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꿈에라도 한 번 나와주셨으면 좋겠는데, 아직 오시지 않네요." 사진 구혜정 기자.
"지금도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꿈에라도 한 번 나와주셨으면 좋겠는데, 아직 오시지 않네요." 사진 구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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