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방황한 ‘속물주의 글쓰기’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뜨락 가득 발그스름한 벚꽃들이 휘날리네요. 너무도 아름다워 자꾸 시선을 잡아끌지만 갈 길이 머니 그냥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글 고쳐 쓰기’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했지요? 이런 제재는 글 쓰는 사람들이나 필요할 것 같지만,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자신이나 남에게 말하고, 그걸 다시 고치고, 기억하며 삽니다.

글쓰기는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되어가는 노년층의 삶에 아주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글을 고치는 도중에 우리 사회에 그릇된 방향으로 만연된 ‘지적 속물주의(snobbism)’를 바로잡고,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고른 제재입니다.

그럼 속물주의의 의미부터 알아볼까요? 이 용어는 1846년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W. M. Thackeray, 1811∼1863)가 쓴 ‘속물 열전(列傳)’으로부터 보편화한 용어로, 현실이라는 흙탕물 속에 발을 담그고 살면서 ‘백로(白鷺)처럼 고상하게 살려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고,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모두가 이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게 글쓰기와 고쳐 쓰기만 해도 그랬습니다. ‘나의 실존(實存)’은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의 질(質)’에 의해 결정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글쓰기를 택했지요. 그러니까 고급스럽게 살고 싶다는 속물주의가 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내 인생을 결정짓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좀 더 잘 써야 하겠데요. 그래서 뒤늦게 대학에 편입하고, 학부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대학원에 들어가 석ㆍ박사 학위를 받고, 평생 연구하고, 가르치고,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백로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오늘의 저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나 백로의 꿈은 노력한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더군요. 내 딴에는 제법 괜찮은 작품이나 논문인 것 같은데도 발표 지면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장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발표하고 다시 고치고 다듬어도 출판할 곳이 없어 자비로 출판해야 하고, 겨우 출판해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도 “잘 받았습니다.”나 “수고했습니다.”가 전부인 겁니다.

그래서 젊은 날에는 프랑스 구조주의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 G. Barthe, 1915~1980)의 ‘파리 인텔리겐차의 현주소’를 들먹거리면서 ‘제주 촌놈’ 처지를 한탄했지요. 파리 문화예술인들의 등급은 문화면(文化面)이 강한 르 몽드지와 인문 서적을 많이 펴내는 쉐이유 출판사가 매기는 등급에 따라 결정되고, 그들의 기준은 작품성이나 참신성보다는 자기들의 이해관계, 그러니까 판매 수익과 친분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하지만 그들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데요. 그래서 내 원고들을 검토해봤지요. 어떻게든지 고쳐 그들이 거꾸로 내게 매달리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자랑스럽게 생각한 작품들은 너무 단순하고, 잘난 척하고 쓴 이론들은 서구 이론들을 짜깁기한 선행 연구들을 다시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고….

우선 고쳐 쓸 방향을 결정해야겠데요. 고민하다가 시를 ‘이성과 감성의 포괄’로 보는 영국의 주지주의 시인 엘리엇(T. S. Eliot, 1888∼1965)과 미국의 신비평 그룹 존 크로 랜섬(J. C. Ransom, 1888∼1974)의 이론을 받아들이되, 그들이 부도덕하다고 배제한 ‘무의식’과 ‘논리적 분석’을 다 담아야 한다면서 그동안 발표한 작품과 시론들을 고쳐 쓰기 시작했지요. 

  T S  엘리엇(왼쪼걔)과  존 크로 랜섬. 
  T S  엘리엇(왼쪽)과  존 크로 랜섬. 

그때는 아주 신이 났었습니다. 1980년대까지 전 세계 대학 강단을 지배해온 시론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에.

그러나 그렇게 고쳐 써도 세상은 여전히 고요하데요. 그래서 다시 살펴봤지요. 그러다가 아주 경악할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얼핏 이야기했겠지만, 우리 생각은 정서와 감각과 논리와 무의식이 동시에 뒤섞여 흐르지만 그를 표현하는 언어는 단선적(單線的)이라서 어느 한 가닥만 골라 말하고, 또 순서가 바뀔 수 있고, 글을 쓰거나 다듬을 때는 ‘가상현실(假想現實) 상태’에 빠지지만, 읽을 때는 해석하느라고 그럴 여유가 없는 겁니다.

방법이 없데요. 그래서 작품은 눈에 띄는 것만 고치고, 자서전을 두 문예지에 7, 8년간 세 번 고쳐 연재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 문예지에는 2년 연재하다가 중단하고, 다시 고쳐 3년간 연재하고, 다른 문예지에 그걸 고쳐 3년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문학이론서들도 네 권이나 고쳐 써 연재했습니다.

자서전은 같은 이야기일 텐데 고쳐 썼다고 문예지들이 받아줬느냐고요? 네에. 줄거리는 같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니까요.

그러니까 첫 번째 연재에서는 제 문학의 이론의 탐구 과정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재에서는 그 이론을 어떻게 작품에 적용했는가에 맞췄고, 세 번째 연재에서는 그런 이론이나 작품과 제 삶의 관계에 맞췄고. 그 과정에서 시와 전기와 비평과 소설을 뒤섞은 장르를 만들어냈더니 오히려 다른 곳으로 튈까봐 신경을 쓰더군요.

하지만 제 고쳐 쓰기는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닙니다. 2019년에 시 전집을 펴낼 때 또 고쳐서 그 시집의 작품을 쓰던 시절 이야기 단위로 나눠 붙여 펴냈고, 지금도 또 고쳐 금년 하반기부터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전자책으로 만들어 뿌릴 작정입니다. 아마 동·서양 문학사에서 저처럼 계속 고쳐 펴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시니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귀띔을 해준다고 하더니 왜 계속 자기 소리만 하느냐고요? 죄송합니다. 최근에 다시 고쳐 쓰기 시작한 이유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말씀드릴게요.

이 세 번째 고쳐 쓰기는 지난주에 이야기한 동유럽을 여행할 때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게는 ‘동서시학(東西詩學)의 대비적 연구’ 이외에도 다른 과제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평생 ‘사형(師兄)’으로 모셔온 분의 시집 발문(跋文)을 써야 하는.

물론 그런 글은 며칠이면 쓸 수 있지만 출국 한 달 전에 부탁을 받고도 못 써 노트북에 담아가지고 유럽까지 날아가고, 독일을 거쳐 헝가리를 거쳐 슬로베니아까지 가면서 고심한 것은, 그분의 작품은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지만 좀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러나 제 작품보다 훨씬 감동시키는 힘이 강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상대의 장점을 소개하는 발문이라지만, 그냥 좋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데요. 그래서 한 달 이상 고심하다가 슬로베니아 국경 근처의 어느 호수에서던가 점심을 먹다가 아주 문득 나는 시상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쉬클로프스키(V. B. Shklovsky, 1893∼1984)가 주장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어법을 구사하는 반면에, 사형은 동양 예술의 전통적 어법인 ‘여백(餘白)’을 만들고, 그 빈 공간에서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의 시가 잘 읽히고 공감력이 강한 건 독자 스스로 해석하도록 풀어줬기 때문이고. 제 시가 새롭긴 하되 잘 안 읽히고 공감력이 약한 것은 나를 내세우면서 강요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로베니아에서 보낸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문을 써서 보내고, 그 뒤부터 5년 동안은 독자들을 존대하는 어법으로 고쳐 써왔습니다. 심지어는 객관을 가장 강조하는 ‘문학연구방법론’마저 구어체와 존댓말로 고쳐 써서 연재했습니다.

이제 약속드린, 시니어들이 마음속으로라도 고쳐 써야 할 이유와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고쳐 써야 하는 이유는 그러는 동안에 외로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이렇게 고쳐 쓰다보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손을 잡고 쓰담쓰담하면서 서로 위로해줘 충만감을 느끼며 살 수 있기에 권유 드리는 겁니다.

그다음, 현실의 일이 아니기에 ‘지적인 스노비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젊은이들을 그렇게 이끌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내 자식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오만은 내가 젊었을 때 부린 오만을 본받은 결과이니 시니어들이 책임져야 하겠지요.

자아, 그럼 고쳐 쓰는 방법을 말씀드리고 물러나겠습니다. 우선 나를 접어두고, ‘상대’와 ‘화제’를 주목하고, ‘절친’끼리 담소를 나누듯 고쳐 쓰라는 겁니다.

이 방법은 독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만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아직 학설로 정립되지 않은 것들도 상의 드리는 어투로 끼워 넣을 수 있고,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뭐든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드리는 권유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집착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유롭게 반대쪽을 넘나들면서 즐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끼리 합치라는 겁니다. 그럼 아주 재미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 작품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 제3시집과 5시집은 말[言]을 제재로 삼은 작품집입니다. 어느 날 답답해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다가 카페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옆 테이블의 아가씨가 남친에게 “자기 말 속에 또 다른 말이 들어 있는 거 같애.” 하는 겁니다.

그 순간,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고, 그 말들끼리 모여 사랑할 수도 있고, 그래서 말을 낳을 수도 있고, 말의 나라를 만들 수도 있고, 그들끼리의 사랑의 윤리를 만들어 권유할 수도 있고…. 끝없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날아다녀 무한한 상상략이 펼쳐져 두 권의 시집을 펴내고, 그래서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지적인 시인이라는 대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자유롭게 고쳐 쓰면 뒤늦은 나이지만 시인이 될 수도 있고 석학이 될 수도 있기에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다음, 우리 문화와 관습과 어법에 맞춰 고쳐 쓰라는 겁니다.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자국어에 다른 나라 말들을 끼워 넣어 혼란을 일으키는 나라는 없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지적인 속물주의’의 개념을 검색하다가 읽은 설명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리어답터’로 대변되는 ‘인플루언서’들에게 ‘PPL 광고’를 통해 공급하여 ‘스노브 효과’를 노린다. 1차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면 이제 2차로 얼리어답터들의 반응을 가지고 ‘요즘 대세론’을 바탕으로 ‘반응 폭발!! 없어 못 판다’는 광고를 하여 ‘밴드왜건 효과’는 사실 식상한 ‘마케팅 전략’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아직 잘 먹히는 전략이기는 하다.

따옴표로 묶은 말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들은 몇 개나 아십니까?전 ‘마케팅 전략’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 설명문을 쓴 분만 그러는 게 아니었습니다. ‘얼리어답터’의 뜻을 좀 더 정확하게 알려고 검색하다가 보니까 ‘덕후’라는 용어가 나오고, 다시 찾아보니까 일본어의 ‘오타쿠(御宅)’에서 비롯된 용어라는 겁니다. 엊저녁 방송에서는 ‘T P O’라는 말도 나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는 없습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네들이 이런 우리 사회의 속물주의를 바로잡고 실천해 보여주신다면, 이제까지 베껴 쓰기만 했던 우리 학문과 문화 예술이 세계를 이끌 수 있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을 알고 합칠 수 있습니까요.

이제 담 담 주, 그러니까 4월 21일에 뵙겠습니다. 너무 힘들어 편집부의 ‘대기자 각하’께 격주로 연재하기로 허락을 받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음 주제는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교육 시스템을 고친다고 해서 그 문제를 논의해볼까 하니, 그때 뵈어요. 사랑해요. 안녕,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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