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엔 해체 ‘해소제’가 있다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이제 대통령 선거일이 6일 남았네요. 지난주 제가 우리말의 속성을 함께 생각해보자고 했지요? 이 복잡한 시기에 이런 주제를 잡은 건 당선된 분이든 고배를 마신 분들이든 국민들에게 드릴 인사말을 준비할 때, 우리말에 드리워진 속성을 염두에 두라고 권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니, 정치를 하는 분들을 위해서만 고른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견뎌온 국민들도, TV를 끄고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면한 분들도, 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야’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분들도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기에 고른 제재입니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하고, 그렇게 소통하며 얻은 정보를 언어로 판단하고, 언어로 저장하고, 그 언어의 지배를 받는 존재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말의 속성부터 알아봐야 하겠지요? 저는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언어의 유형을 ‘화자(話者) 지향형’, ‘화제(話題) 지향형’, ‘청자(聽者) 지향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화자 지향형은 자기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언어로, ‘인도 유럽어 어군(語群)’과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아랍 어군’을 꼽고 있습니다. 언어학에서는 이들의 어미(語尾) 변화를 주목하고 ‘굴절어(屈折語)’라고 부르지요.

제가 이들을 화자 지향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화자의 판단을 나타내는 주어와 서술어를 말한 다음, 그 뒤에 배치한 성분들도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말하기 위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먼저 말하고, 또 강조하니까요.

청자 중심으로 분류하는 언어는 터키에서부터 몽골을 거쳐 만주,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우랄 알타이어군’을 말합니다. 우리말이 포함된 어군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주어는 되도록 생략하고, 화자의 판단을 나타내는 서술어는 맨 나중에 말하고, 청자의 판단을 도울 성분들을 먼저 말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언어학에서는 이 어군을 어근(語根)에 조사나 어미를 덧붙이는 점을 주목하고 ‘첨가어(添加語)’라고 부르지요.

화제 중심의 언어는, 중국, 베트남, 타이, 티베트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어군의 어휘들은 독립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문법적 관계는 어순(語順)에 의지하는 고립어(孤立語)라서. 그로 인해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면 새로운 어휘를 만들 수밖에 없지요. 청나라 시절에 펴낸 ‘강희자전(康熙字典)’(1716)에 49000여 자가 수록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지향성은 어휘의 발달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인도 유럽어는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관념어를 아주 발달시켜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language)’라는 말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회적 문법 체계를 의미하는 ‘랑그(Langue), 그에 의해 개인이 실제로 하는 말인 ‘파롤(Parole)’, 그 말의 의미인 ‘시그니피에(signifee)’.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 체계인 ‘시그니피앙(significant)’으로 세분하고 있습니다.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전 세계의 학문이 이 언어권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도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언어적 특질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청자 중심의 언어들은 듣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감각어들이 발달했습니다. 영어의 경우 붉다는 어휘는 ‘붉은(red)’, ‘불그스름한(ruddy)’, ‘심홍색(crimson)’, ‘주홍색(scarlet)’뿐이지만, 우리말에는 ‘불그스름한’, ‘발긋발긋한’, ‘새빨간’, ‘검붉은’을 비롯해 수십 개도 넘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꾸미는 관형어나 부사어를 덧붙일 경우 수백 개도 넘습니다. 자기 아내를 공유의 뉘앙스가 어른거리는 ‘우리 마누라’라고 하는 것도, 최근에 등장한 현상이지만 K팝이나 영화가 전 세계를 휩쓰는 것도 이런 지향성 때문일 겁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번에 출마했던 분들은 물론 뭔가 이루고 싶은 분들은 유목민족들의 어법으로 물든 우리말의 얼룩을 지우고, 본래의 지향성을 염두에 두고 화제와 어법을 택해야 할 겁니다. 그동안 전 국민이 이전 출마자들의 말을 지긋지긋하게 느꼈던 것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말과 글을 ‘잘났어! 정말…….’하고 외면해온 것도 ‘우리’가 아니라 ‘나’로 시작해 ‘내로남불’을 해왔기 때문이니까요.

그런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요? 네. 제 경험으로는 ‘우리’로 시작해 한 말들은 모두 효과를 봤습니다. 뒤늦게 공부하고, 학벌도 별로인 사람이 박사과정을 수료하자마자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교수가 된 것도 면접 때 ‘우리’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채용된다면 제주도와 대학을 위해 뭘 하겠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제주인들의 삶과 역사를 제재로 삼아 작품을 써서 홍보 대사 노릇을 하고, 학생들과 이를 밑받침할 이론을 만들어 제 전공 분야만은 세계 어느 대학에도 뒤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럴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해 5월 세미나에 왔을 때 관광 가이드가 우스갯소리로 소개해준 ‘강 방 왕 고라주꾸다(가서 보고 와 말씀드리겠습니다)’를 예로 들면서, ‘강 방 왕’처럼 연속된 유성자음은 바다 위에 동동 떠있는 테왁을 연상시키고, ‘고라주꾸다’ 같은 격자음의 연속은 제주 해녀들의 숨비소리와 애환을 느끼게 한다는 걸 말하고, 그럴 의지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미국 남부 밴더빌트 대학의 랜섬(J. C. Ransom, 1888∼1974) 교수처럼 살겠다고 했지요. 랜섬 교수는 제자들과 신비평 이론을 만들어내어 1950년대 후반 세계의 대학 강단을 지배한 사람입니다. 

  폴 왈렌(왼쪽)과 솔로몬 애쉬.
  폴 왈렌(왼쪽)과 솔로몬 애쉬.

지난번에 어떤 선생님이 지적해주셨듯이 우연한 결과를 일반화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폴 왈렌(P. J. Whalen, 1965∼ )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편도체를 통해 0.1초도 안 되는 순간의 인지 결과에 의해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신뢰도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학술 용어로는 ‘초두(初頭) 효과(Primacy effect)’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역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 Asch, 1907~1996)는 인식의 순서와 내용의 긍정성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실험으로 입증해 보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해 A그룹에게는 똑똑하다, 근면하다에 이어 충동적이다, 비판적이다, 고집스럽다, 질투심이 많다라고 설명해주고, B그룹에게는 정반대로 질투심이 많다, 고집스럽다, 비판적이다, 충동적이다라고 한 뒤에 근면하다, 똑똑하다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순서만 바꾸었을 뿐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똑하다', '근면하다'를 먼저 말해준 쪽의 사람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겁니다. 먼저 말한 것이 ‘각인(imprinting)’이 되어 ‘인식의 틀(frame)’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같은 평가인데도 어떤 순서로 말하느냐에 따라 상반되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같은 평가인데도 어떤 순서로 말하느냐에 따라 상반되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맞는 말 같대요. 우리가 외출할 때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만지작거리는 것도, 어려운 부탁을 할 때 목소리의 톤과 뉘앙스부터 고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니까요. 그리고 지난 선거판의 주장을 끝까지 듣지 않고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라 ‘나’로 시작하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적인 갈라치기로 낙인찍기를 했기 때문이니까요.

사람이 안 바뀌고 말만 바꾸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의도적으로 말을 꾸며내는 사기꾼이 아니라면 그래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다’”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갈라치기는 할 수 없을 테고, 그게 초두 효과를 발휘하여 가능하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존재’인 동시에 말했거나 들은 사람을 그쪽으로 끌고 가는 ‘에너지’니까요. 제 40대 이후의 인생도 면접 때 한 그 말에 이끌려 살아왔으니까요.

그럼 다음 주의 주제를 말씀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에……, ‘우리가 꿈꾸는 지도자상’을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다음 주에 만나요. 안녕, 안녕, 사랑해요,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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