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고려사’는 김종서 정인지 등이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1)에 완성한 역사서다.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했다. 이보다 1년 후 김종서 등 18명이 편찬한 ‘고려사절요’의 특징은 고려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것이다. 절요(節要)는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만 축약했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간추린…’이 되겠지만,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를 그냥 줄인 게 아니어서 서로 보완관계인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어느 저녁 모임에서 평소 역사서를 즐겨 읽는다는 사람이 “고려사절/요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몽골의 침입과 팔만대장경 조판 등의 시기인 고려 고종시대가 특히 흥미롭더라는 것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하다가 ‘고려사/절요’라는 걸 알았다. 절요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왜 몇 번이나 그렇게 발음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1804?~1866?)가 만든 우리나라 전도다. 대동(大東)은 우리나라를 동방의 큰 나라라고 일컫는 말이며 여지(輿地)는 땅덩이, 대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대동여지도는 ‘대동/여지도’라고 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학교에서 김정호를 가르치는 지리 선생님이건 학생들이건 대부분 ‘대동여/지도’라고 발음한다. 지도의 명칭이기 때문에 그렇게 발음해야 한다고 혼동한 탓이다.

그런 건 사실 많다. 사물의 명칭이나 단어, 문장을 제대로 발음하려면 그 구조를 파악해야 하고 단어의 장-단음 여부, 거기에 쓰인 한자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상재상서(上宰相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회의 성인 정하상 바오로(1795~1839)가 박해의 주동자인 우의정 이지연에게 가톨릭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려고 쓴 글이다. 이 ‘재상에게 올린 글’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호교론서(護敎論書)로 평가되고 있다.

'상재상서'를 들고 있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 동상. 양평성당에 있다. 
'상재상서'를 들고 있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 동상. 양평성당에 있다. 

그러니 그 글을 정확하게 발음하려면 ‘상/재상서’라고 읽어야 한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아는 가톨릭 관계자들마저 ‘상재/상서’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얼핏 상제(上帝), 하느님에게 올린 글인 것처럼 들린다.

‘추억의 소렌자라’라는 샹송이 있었다.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태생의 샹송 가수 앙리코 마시아스(Enrico Macias, 1938~)의 히트송이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 그가 앙리 꼬마샤스인 줄 알았다. 앙리라는 성이 있으니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발음으로 인한 연상작용으로 ‘키가 작은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들은 라디오방송의 진행자가 “이번엔 앙리 꼬마샤스의 노래를 들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해 그 이름으로 입력됐기 때문이다.

한문의 경우엔 띄어 읽기가 어렵거나 잘못 읽거나 어느 게 정확한 건지 몰라 혼란스러운 사례가 특히 많다. ‘논어’ 향당(鄕黨)편의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공자가 어느 날 조정에서 집에 돌아오자 하인이 마구간에 불이 났다고 아뢰었다. 그때 말은 요즘의 자가용 승용차다. 그런데 공자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가?[廐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라고 물었다. 

그런데 한문은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없다. 마지막 부분을 “상인호 불문마(傷人乎 不問馬)”라고 읽지 않고 “상인호불 문마(傷人乎不/問馬)”로 읽으면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뒤 말에 대해 물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이 그렇게 읽었다. 조선에서는 효종 때의 남인 윤휴(尹鑴, 1617~1680)가 그렇게 해석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사람이 다쳤느냐고만 묻고 말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불문마(不問馬)’ 대목은 공자의 인본사상을 알려주는 대표적 문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람도 묻고 말에 대해서도 물었다는 해석이 더 폭넓고 합리적일 텐데도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조금치도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고 이단으로 배척했다.

띄어 읽기의 혼란에 관한 극단적 사례는 ‘불가불가(不可不可)’다.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역임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조약에 대해 ‘불가불가(不可不可)’라고 배서(背書)함으로써 분명한 반대를 표명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을사오적(乙巳五賊)과 일본인들은 이걸 불가불/가(不可不/可), 딱히 다른 도리가 없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 내각대신 전원의 찬성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순종 황제가 소집한 어전회의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글로 써야만 그런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김윤식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나. 그는 당시나 사후에나 논쟁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민족주의자라는 시각과 친일파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조선총독부 부의장이었고 조선귀족 자작이었지만 1919년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3·1운동에 동조한 점이 인정돼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KBS TV의 '우리말 겨루기' 츠로그램. 띄어쓰기 붙여 쓰기 문제가 특히 어렵다. 
KBS TV의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 띄어쓰기 붙여 쓰기 문제가 특히 어렵다. 

우리말과 글은 참 어렵다. 띄어쓰기도 어렵지만 띄어 읽기도 그만큼 어렵다. KBS TV의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생애도 띄어쓰기와 띄어 읽기가 정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독과 오해가 빚어지고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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