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와 패스티쉬 사이에서

윤석산 시인·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우리 시대의 해체를 해결하는 방법을 함께 논의해보자고 말씀드렸지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1960년대 중반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탁(Susan Sontag, 1933~2004), 피들러(Leslie A. Fiedler, 1917~2003) 등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예술 사조부터 살펴봐야 하겠네요.

아직도 ‘포스트(post)’를 ‘후기(後期)’로 봐야 하느냐 ‘탈(脫)’로 봐야 하느냐를 논의하는 이 사조를 살펴봐야 하는 것은 칸트나 헤겔의 변증법처럼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고, 차이만 날 뿐 옳고 그른 게 없다는 해체주의처럼 새로운 것이 없다는 해체적 관점을 내세우면서도 ‘패러디(parody)’나 ‘패스티쉬(pastiche)’ 방법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이중적 관점 때문입니다.

왼쪽부터 수전 손탁, 존 케이지, 도널드 바슬미.
왼쪽부터 수전 손탁, 존 케이지, 도널드 바슬미.

물론 이런 어법은 이들이 처음 사용한 건 아닙니다. 혼성모방(混成模倣)이라고도 불리는 패스티쉬는 대상을 정확히 분석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어법을 말합니다. 따라서 창작의 기본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초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패러디는 대상의 약점과 위선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암시적이고 산발적으로 사용해온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사용하는 어법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게 표현하며,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가령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왔던 도널드 바슬미(D. Barthelme, 1931~1989)의 ‘백설공주’(1967)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1800년대 초 그림 형제의 동화를 1960년대 상황에 맞춰 패러디한 소설로, 빌을 비롯한 일곱 난장이들은 정상적인 성인 두 사람 정도 체중에 불과하고, 미국 각 지역의 국립공원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가계도, 혈통도, 성격도, 외모도 그리지 않은 상태로 등장합니다.

반면에 여주인공 백설공주는 유럽 문화와 역사와 예술 등을 두루 공부한 지적 여성입니다. 하지만, ‘미인’이나 ‘공주’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성조기 색깔인 푸르고 붉고 흰색의 두껍고 불룩하고 맵시 없는 바지를 입고, 그들을 위해 빨래와 청소를 하고, 성적 욕망까지 충족시켜주는 여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이야기 중간에 열다섯 번이나 앙케이트 식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것이 없기에 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거 일원주의 시대의 미학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과(因果) 관계를 접어두고, 구성상으로는 ‘임의성’ㆍ’우연성’ㆍ‘탈 형식성’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장르의 ‘해체와 통합’, 기계를 이용한 제작과 디지털화,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 작업을 시도합니다.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존 케이지(J. M. Cage 1912~1992)의 ‘4분 33초’나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의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래지어’, 레몽 크노(R. Queneau, 1903~1976)의 ‘무한한 수의 시’를 비롯한 ‘기계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 Nabokov, 1899~1977)의 ‘창백한 불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1990년 7월 백남준이 정신적 동지였던 독일 예술가 요셉 보이스(1921~1986)의 추모굿 ‘늑대걸음으로’ 현장에서 속이 빈 피아노에 삽으로 흙을 뿌리고 있다.
1990년 7월 백남준이 정신적 동지였던 독일 예술가 요셉 보이스(1921~1986)의 추모굿 ‘늑대걸음으로’ 현장에서 속이 빈 피아노에 삽으로 흙을 뿌리고 있다.

유명 작가이자 작곡가이고 교수인 케이지의 작품은 연주를 하다가 4분 33초 동안 중지해 관중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주는 작품이고,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건축학을 공부한 우리나라 출신 백남준은 조각 작품에 TV를 브래지어처럼 걸어놓고 우주선의 달 착륙을 중개하는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거나 또 다른 작품에서는 공연 중에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부수기도 합니다.

1000여 편의 시를 발표한 크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5편의 소설을 발표하는가 하면 시나리오 작가, 수학자, 번역가, 화가, 출판인으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곤충학자인 나보코프의 소설은 창작 과정을 다룬 메타픽션으로, 소설 비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자유로움의 날개를 타고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예술 전반은 물론 사회 전반으로 뻗어 나갑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싫어했던 이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의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전후 세계문제시집’과 ‘전후 한국문제시집’ 두 시집을 패스티쉬와 패러디 방식으로 읽고 문단에 나섰지만 시대를 초월할 인류 공동의 이념을 마련하고,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신비평 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쓰고 싶었는데, 글 쓰는 행위는 ‘표절 놀이(plagiarism)’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주장하는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은 부정할 수 없데요. 제가 시인이 된 것도 두 권의 앤솔로지를 읽은 덕분이고, 그 책에서 만난 시인들도 동시대나 앞 시대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전해오는 것들을 뒤섞고, 비틀고, 비중을 조절하는 것밖에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또 다른 해체주의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디와 패스티쉬를 통합의 비결로 내세우려는 것은 이런 논리적 좌절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삶과 문화 속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첨병인 컴퓨터와 웹 네트워크가 깊숙이 들어와 있고, 이로 인해 형성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은 개인이 아무리 기를 써도 능가할 수 없으며, 나만 옳다든가 새롭다는 주장은 오히려 해체를 가져온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럼, 패러디와 패스티쉬 가운데 어느 어법을 추천하고 싶냐고요? 젊은 날에는 내가 옳다는 식의 패러디 쪽에 더 끌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패스티쉬 쪽이 더 끌리데요. 패러디는 ‘너와 나’의 구분에서 출발하고, 패스티쉬는 ‘우리’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에.

다음 주 목요일에는 우리 문화의 문제점인 ‘빨리빨리 심리의 근원’을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안녕, 안녕, 그때 만나요.(♥)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