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2월 4일은 입춘이다. 24절기 중 첫 번째인 입춘을 지나면 우수(2월 19일), 경칩(3월 5일)으로 봄이 열리게 된다. 나는 대문 등에 붙이는 ‘입춘대길’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 같다는 글을 지난해 입춘 때 쓴 바 있다. 이어 경칩 때는 경칩의 원래 이름이 계칩(啓蟄)이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

올해 입춘을 맞아서는 ‘의춘대길(宜春大吉)’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이 말은 중국에서 들어온 뒤 오랫동안 쓰이다가 입춘대길에 밀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게 됐지만, 글자 자체로만 보면 밋밋한 입춘보다 뜻이 더 깊다. 의춘은 풍우가 고른 봄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며 농사가 잘되고 환난이 없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니 단순히 절기만을 이야기한 입춘대길보다 더 좋다.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입춘 시를 읽어보자. 첫 줄에 나오는 도부(桃符)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이다. 정월 초하룻날 잡귀를 막는 뜻으로 문짝에 붙여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백엽주에 도부로 한 해가 또 시작인데

늙어가니 가절이라도 자꾸만 망설여지네

오늘 아침엔 억지로라도 의춘이라 써 붙이리

꽃과 새는 원래가 사람 속이지 않으니까

柏葉桃符歲事新 暮年佳節重逡巡

今朝强帖宜春字 花鳥元來不負人

상촌의 시에서 보듯 입춘에 의춘이라는 말을 쓴 걸 알 수 있다. 입춘 날에 소동파의 시에 차운했다는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의 시에는 “타향에서 의춘첩을 굳이 써서 뭐하리오[他鄕不用宜春帖]”라는 말이 나온다. 최립은 상촌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이들보다 한 세기 전 사람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입춘 시 2수 중 하나는 이렇다.

새벽에 거울 보니 백발은 한층 더했는데

조그마한 종이 오려서 의춘을 붙이노라

머리 가득 번승은 되레 부끄럽기만 하고

소반 속의 오색 신채는 정말 보기도 싫네

淸曉臨銅白髮新 裁成小紙貼宜春

滿頭幡勝還羞澁 厭見盤中五色辛

옛날 입춘일에는 ‘의춘’ 두 글자 모양을 종이로 오려 만들거나 글씨로 써서 창이나 그릇 채승(彩勝) 등에 붙여 봄맞이[迎春]를 표시했다. 채승은 머리에 채색한 조화(造花)를 꽂아 봄을 반기는 건데, 번승(幡勝)과 같은 말이다. 당나라 최융(崔融)의 시 ‘춘규(春閨)’에는 “의춘 글자를 오려 만들려 하니, 봄추위가 가위 속에 들어오누나.[欲剪宜春字 春寒入剪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는 “입춘날 모두 색종이를 잘라 제비를 만들어 비녀에 달고, ‘의춘’이라는 두 글자를 붙인다.[立春日 悉剪綵爲燕以戴之 帖宜春二字]”라고 기록돼 있다. 중국의 지방지(地方志)를 보면 광복 이후에도 ‘宜春’ 두 글자를 문에 붙였다고 한다.

         네 가지 서체로 쓴 의춘대길.  
         네 가지 서체로 쓴 의춘대길.  
  의춘대길 사해득령. 봄을 기리면서 온 세상이 편안하기를 비는 문구다.  
  의춘대길 사해득령. 봄을 기리면서 온 세상이 편안하기를 비는 문구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이미 ‘의춘대길’이라고 쓴 사실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 ‘사대전고(事大典故)’ 편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인조) 신사년에 함양(咸陽)의 백성이 흙을 파다가 한 개의 질그릇전[瓦]을 얻었는데, 위에는 ‘일천년내 유황금 14편(一千年內有黃金十四片)’이라 새겨져 있고, 한쪽에는 ‘의춘대길(宜春大吉)’이라 새겨져 있었다. 역관(譯官) 이완(李俒)을 보내 그것을 중국에 바쳤더니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옛날 신라의 금(金)을 얻었는데 왕이 스스로 가지지 않고 특히 사람을 보냈으니, 상국(上國) 섬기는 정성을 볼 수 있다. 그 글자의 말뜻은 상서로운 조짐인 듯하다. 왕이 얻은 것은 곧 짐이 얻은 것과 같으니, 원금(原金)은 온 관원 편에 되돌려 준다.' 하였다."

당시 상황은 승정원일기 인조 19년(신사) 5월 3일의 기록에 좀 더 자세하다. 금을 청나라에 바치자, 그건 좋은데 그들이 알기 전에 바치는 게 좋은가, 알고 난 뒤 보내는 게 좋은가 하고 왕과 신하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

"상이 이르기를, '원년(元年)이 얻은 금(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2자 원문 빠짐-얻은 것을 심양(瀋陽)에 보낸다면 필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천년이나 소중히 묻혀 있던 것이-몇 자 원문 빠짐-예사로운 일이 아닐 듯하니, 달리 사용하지 말고 말을 잘 엮어 문장을 지어 들여보내도록 하라.' 홍서봉이 아뢰기를 '만약 이것을 예사롭지 않은 상서로 여겨서 심양에 보낸다면 저 나라가 반드시 -몇 자 원문 빠짐- 참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명이 아뢰기를, '금을 토실(土室) 안에서 얻었는데 그것을 얻을 때 그의 아내가 상서로운 기운이 방에 가득 찬 꿈을 꾸고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에 ‘의당 봄처럼 크게 길하리라.[宜春大吉]’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으로 나라에 이롭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원래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130냥(兩)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을 잘 엮어 글을 지어서 청나라가 그것에 대해 듣기 전에 보내도록 하라.' 하니, 신경진이 아뢰기를, '그들이 들은 뒤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후에 보내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그들이 듣기 전에 보내는 것이 낫다. 저들이 이 금을 얻는다면 그것이 많음을 좋아하고 또 크게 떠벌릴 것이다.' 했다.(하략)“

1641년이면 병자호란(1636년)으로 치욕적인 항복까지 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이니 청나라 눈치보기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 뒤 우리 기록에 더 이상 의춘대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입춘에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입춘축으로 가장 흔한 것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다. 하지만 건양은 1896년부터 1897년 8월까지 겨우 20개월 사용된 망국의 연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건양다경 대신 신양(新陽)다경을 쓰자고 한 바 있다.

입춘대길이든 의춘대길이든 봄을 반기며 새로운 농사나 생업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자세는 소중하다. 그중에서도 의춘은 아주 좋은 말이다. 의춘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의령(宜寧)의 옛 지명이다.

의춘을 이름으로 쓰는 사람도 많다. 의춘자(宜春子)는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 1471∼1527)의 미칭이기도 하다. 본관이 의령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의 자는 사화(士華)인데, 1519년 심정(沈貞, 1471∼1531)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됐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젊어서는 촉망과 찬탄을 받던 인물이었으나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입춘에 의춘대길을 써 붙이며 즐겁게 봄을 맞더라도 여름 가을 거쳐 겨울을 지나 풍요롭고 보람있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한평생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으면서도 엄정하고 삼엄한 자연과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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