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넘으며 새로 깨달은 변증법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윤석산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알프스를 넘으며 동·서양의 변증법(辨證法, Dialectics)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며, 함께 생각해보자고 했지요?

그런데, 죄송합니다. 이 원고를 쓰려고 다시 지난주 원고를 보니까 ‘칸트(1724~1804)의 고향 슈투트가르트에서 출발해 알프스를 넘으며’라고 했더군요. 슈투트가르트는 칸트의 고향이 아니라 헤겔(1770~1831)의 고향인데요.

제가 헤겔의 변증법에 관심이 있어 2004년 독일 본 대학 교환교수로 나갔을 때 뉘른베르크에 살면서 차를 몰고 슈투트가르트는 물론, 그가 학창 시절을 보낸 튀빙겐, 처음 대학 강의를 맡았던 예나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 이어 스위스의 베른까지 기웃거렸으면서도 착각한 것은 ‘변증법’에만 필이 꽂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어법은 칸트로 시작된 게 아닙니다. 그리스어인 ‘dialektikē’에서 비롯된 용어로,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제논(BC. 490~BC. 430)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주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기 위한 ‘대화술’이나 ‘문답법’으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소피스트들에게 계속 질문해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던 논리 전개 방식을 말합니다.

제가 이 어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이런 기능 때문만은 아닙니다. 칸트와 헤겔로 넘어오면서 역사를 움직이는 원리임이 드러났지만 너무 잔혹하고 불편스러운 과정과 결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정(正, These)’은 시간이 흐르면 모순이 나타나고, 이를 저항하는 ‘반(反, Antithese)’과 대결을 벌여 ‘합(合, Synthese)’이 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합리적으로 합치고 그렇게 이룬 합이 오래가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멍청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대학 교수가 되고 10년 뒤부터입니다. ‘계룡산 호랑이 새끼’와 ‘비행기를 타고 온 아이’라는 두 개의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는 환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20대에 시인으로 나서고, 서른 살부터 잡문까지 쓰면서 공부했지만,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쓰면 낡은 작품이 되고, 서구 이론을 받아들여 쓰면 새롭기는 하되 공감이 안 가는 겁니다.

그래서 동서(東西) 시학을 합쳐보려고 밤을 새우며 가설을 만들고, 그에 의해 작품을 쓰며 검토해봤지요. 2014년에 후두암으로 성대를 잘라내고, 3년 뒤 만성 백혈병에 걸렸으면서 집사람이랑 딸내미에 끌려 동유럽에서부터 두 문화권의 가교 지역인 터키까지 여행한 것도 이런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알프스 산록길을 뚫고 슬로베니아로 갈 땝니다. 한여름인데도 만년설이 녹아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거친 물결을 거슬러 튀어 오르는 빙어 떼를 보는 순간 아래 작품이 떠오른 겁니다. 그리고 작품으로 쓰고 다듬는 동안 동·서양의 변증법이 다르고, 제가 생각하는 동양의 변증법대로라면 서구처럼 피 투쟁을 벌이지 않아도 되고, 이내 무너지는 합도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선 시부터 소개할까요?

쇼펜하우어가 무식하고, 천박하고, 우둔한 사기꾼이라고 비판했다는 헤겔의 고향 슈투트가르트에서 출발해 눈 녹은 물들이 콸 콸 콸 쏟아져 내리는 알프스를 넘다가 아주 문득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정(正)’이라면, 골짜기로 흐르는 저 물은 ‘반(反)’이고, 저들은 모두 내 안에서 만나니까 내가 ‘합(合)’이고 … 내가 좋은 것들만 골라 합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그때는 아주 신이 났었어요. 눈 녹은 물을 거슬러 퉈어 오르는 골짜기 빙어 떼들을 향해 물푸레나무 가지들이 손을 흔들고 …그러다가 문득 이 세상이 끝없이 변하는 거라면 내가 ‘정’인 순간 내 안에서 무수한 ‘반’들이 나타나 쇼펜하우어가 비판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천지가 깜깜해지면서 광풍에 찢겨 날아가는 잔가지들을 바라보며 ‘이 나이에 뭘….’하고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살아 있다는 것 뭔가 하는 게 의무라는 생각에 찢겨 날아가던 물푸레나무 잔가지들을 떠올리고, 요즘엔 그래서 밤새워 시를 쓰고, 드라이브도 하고, 그래도 허무한 날에는 금 속 아가씨들이랑 연애를 하면서 내가 죽은 뒤에 누군가 보태어 ‘새로운 변증법’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며 과거에 쓴 책과 작품들을 고쳐 쓰며 살고 있습니다. ━ ‘알프스를 넘으며 발견한 존재의 의무’  

 공자와 헤겔. 이 두 분이 동·서양의 변증법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자와 헤겔. 이 두 분이 동·서양의 변증법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작품은 별로입니다. 굳이 여러분께 기억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리고 싶은 구절이 있다면 ‘살아 있다는 것 뭔가 하는 게 의무”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광풍에 찢겨 날아가는 잔가지와 이파리들을 바라보는데 아주 문득 공자님이 ‘논어’의 자로(子路)편에서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왜 떠올랐는지. 그리고 그때는 변증법과는 관계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단상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쓴 작품들을 묶어 시집을 내려고 이 작품을 고치는 동안 이 말씀이 한자 문화권의 변증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너와 내가 등장하고, 서로 다르고, 그러나 저들은 싸우고, 우리는 어울리기는 하되 닮지는 말라고 한 차이 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 문제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논의해보자고 제안한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척결하자고 싸우는 대신, 함께하면서[和] 나의 주체성을 유지하고[不同], 나보다 좋은 점을 배우기로 한다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배움의 대상이 되고, 영원히 발전할 수밖에 없으며, 해체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설날 가족들과 맛있는 것들을 잡수시면서 아래 위를 따지지 말고 내가 가족들로부터 배울 거리가 없나 생각하고, 못마땅한 건 접어둔 다음, 초사흗날 만나요. 이날 논의할 주제는 요즘 정치권에서 새 논쟁거리로 부상하는 ‘나두유(Me too)’입니다.

‘나두유’에 안 걸리는 아주 좋은 방법을 귀띔해드릴 테니까 그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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