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어제 드디어 때를 밀었다. “흥, 또 때 이야기야?” 이러는 분들이 있겠지. 그러나 연 2주에 걸쳐 목욕 이야기를 하면서 때를 밀겠다고 다짐했으니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게 글 쓰는 자의 마땅하고 옳은 도리 아니겠나.

열흘 후면 설날연휴. 원래 촌놈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이발하고 목욕하는 건데, 이발은 며칠 전에 이미 했고 때도 확 밀었으니 이제 나이만 한 살 더 먹으면 된다.

때를 미는 걸 요즘은 좀 있어 보이게 세신(洗身)이라고 한다. 내가 다니는 목욕탕의 세신 요금은 시설과 환경에 비해 거창하고 호화롭다. 그냥 때만 밀면 1만 8000원, 간이 마사지까지 곁들이면 3만 원인데, 별도로 책정된 마사지 부문의 요금이 볼 만하다. 등만 마사지하면 3만 원, VIP마사지는 7만 원, 황제스페셜마사지는 10만 원이다. 과연 ‘황제스페셜’을 받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하여간 종목이 다양하다.

나는 그냥 때만 빼기로 하고 몸뚱이를 맡겼다. 오랜만에 ‘빨래판’ 위에 드러누우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를 빨래한 세신사는 백제 사람처럼 두툼하고도 원만해 보여 호감이 갔다. 때를 미는 손길도 민첩하고 능숙했다. 30여 년 전에 살던 동네의 목욕탕에서 만났던 그 때밀이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공주가 고향인 나도 백제 사람 아닌가. ‘백제 사람이 백제의 때를 미는구나.’, 얼토당토않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        다양한 때밀이 요금표와 때를 미는 '빨래터'(아래).  사진 임철순 
​        다양한 때밀이 요금표와 때를 미는 '빨래터'(아래).  사진 임철순 

세신사들은 정부의 코로나 방역 강화대책에 따라 항상 마스크를 젖지 않게 써야 하며 손님과 사적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마스크 때문에 불편하겠다는 둥 굳이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불편하지만 할 수 없지요. 내가 걸리는 건 괜찮지만 전파매체가 되면 안 되잖아요.”라고 했다. 아니? 나도 언론매체 종사잔데, 늘 이것저것 전파하며 먹고사는 사람인데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나보다 더 투철하네? 나는 잠시, 괜히 부끄러워졌다.

30도 온탕과 43도 열탕을 오가면서 몸을 잘 불린 덕분인지 때는 아주 여법(如法)하고 보람 있게 잘 나왔다. 살갗이 벗겨지는 것처럼 좀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때는 원래 밀기만 하고 당기는 게 아니지. 적폐가 아니라 적구(積垢)를 청산하니 홀가분하고 개운했다. 몸무게도 좀 줄어든 기분이었다. 먼지를 충청도 말로 탑새기라고 하는데, 탑새기는 그 어감상 가볍게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부피와 무게를 함유한 말 같다. 내 때가 바로 그 탑새기인 것 같았다.

원래 때밀이에게 몸을 맡긴 사람은 때가 많이 나오는 걸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그가 자기 직업에 만족과 자부, 성취감을 느끼며 계속 성실하고 충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재료를 제공해줘야 한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세상엔 목욕을 싫어하는 지저분한 사람이 참 많다. 유명인사 중에서는 소설가 이외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회고에 의하면 젊어서 둘이 여관방을 잡을 때 하도 때가 끼어 구두처럼 윤기가 나는 그의 발 때문에 세 번째 집에서야 겨우 투숙을 했다고 한다.

김성동은 이 에피소드를 회고하면서 그가 몸을 씻는 일을 자빡대고 있다고 표현했다. 자빡댄다는 건 어떤 일을 아주 단호하게 거절한다는 뜻이다. 순 우리말이건 외래어건 뭐건 김성동도 이문구와 함께 알아주는 충청도 사투리의 장인(匠人) 아닌가.

하라는 대로 누웠다가 엎드렸다가 그렇게 때를 밀게 하면서 나는 백제와 충청도, 특히 충청남도의 언어와 문화 생각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부르던 ‘충남도민의 노래’는 “7백년 백제역사 이룩한 고장, 찬란한 옛 문화 새로 꽃 피워 이 나라 길이 빛낼 도민 3백만”으로 끝난다. 그런데 대전직할시가 떨어져 나가고 세종특별시가 생기면서 인구가 줄어 충남도 인구는 지금 21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이후 70년 가까운 사이에 90만이 줄어든 셈이다.

내가 부르던 ‘충남도민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충청남도는 1958년에 제정된 '충남도민의 노래'에 이어 1984년에 '충남찬가'를 제작해 충남 도가로 불러오다가 공모를 통해 2020년 10월 ‘충남의 노래’를 선정했다.

      충남의 노래 공모전 포스터(2020년).
      충남의 노래 공모전 포스터(2020년).

백제 사람 같은 세신사 덕분에 이런 것도 다 떠올리고 알아보게 됐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닌가. 나는 지금 충남도민도 아니고 서울시민도 아닌 경기도민이지만, 어쨌든 모처럼 때 빼고 광을 냈으니 ‘이 나라 길이 빛낼’ 일을 지향하기 위해 노오력해야겠다. 그래야 뭔가 보람이 있고 돈 들인 효과가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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