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요즘같이 춥거나 세상살이에 심신이 고단할 때면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잠그고 앉아 있고 싶어진다. 목욕은 물로 삶을 새롭게 만드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특히 뜨거운 물은 심신을 녹여준다.

그런데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마음 놓고 목욕을 할 수가 없다. 지난해 3월 경남 진주의 한 목욕탕에서 200명 넘는 확진자가 나온 뒤부터 목욕탕을 찾는 손님들이 급격히 줄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원래 사양길이었던 동네 목욕탕은 코로나로 결정타를 맞아 이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다.

며칠 전 한 신문은 정부 공공 데이터 포털을 인용, 2019년에 전국 6976곳이던 목욕탕이 작년 말 6269곳으로 줄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 확산세가 심했던 서울에서는 이 기간에 940곳에서 768곳으로 줄었다고 한다.

헬스센터에 딸린 사우나업소도 정부의 방역지침에 맞춰 휴업과 영업을 반복하거나 문을 열더라도 욕조 운영을 하지 않고 샤워만 허용하곤 했다. 골프장 역시 목욕장을 운영하지 않거나 옷을 갈아입는 라커도 아예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목욕을 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불편과 불만은 점점 커져간다. 누구를 찍을 거냐, 이런 정치 여론조사만 거푸 하지 말고 국민 목욕 여론조사를 한번 해보라. 국민들은 지금 온몸에 피로와 스트레스, 울화병과 때가 잔뜩 끼어가는 중이다. 종전엔 목욕탕에 가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상사였지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된 가장 대표적인 게 목욕탕 가기다.

1년 가까이 몸을 물에 담그지 못해 스트레스가 심하던 남자가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다며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가족들을 이끌고 지방 온천의 호텔 가족탕을 찾아갔다. 돈은 좀 들었지만 호텔을 나서면서 그가 한 말은 “야, 이제야 정말 살 것 같다”였다. 아이들도 모처럼 물장구치고 물싸움하며 까르르 웃고 즐겼다. 며칠 전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이야기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원래 다니던 헬스센터의 사우나는 코로나 예방을 위해 문을 닫다 열다 하더니 지난해 4월 건물에 화재가 난 이후 지금껏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좀 멀지만 찜질방과 헬스센터를 갖춘 다른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그는 중이다. 내가 매일 목욕을 한다고 말하면 놀라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가 겁이 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니는 목욕탕. 이발소를 리발소(아래)라고 써놓았다.  사진 임철순.
내가 다니는 목욕탕. 이발소를 리발소(아래)라고 써놓았다.  사진 임철순.

지난주에 쓴 글에도 언급했지만 연초라서 그런지 요즘 목욕탕은 손님이 많다. 새해에는 뭔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심리가 목욕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도 목욕을 하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는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는 말이 나온다. 요즘 같으면 옷을 털어서 입는 게 아니라 갈아입겠지만, 목욕을 하고 나면 깨끗함을 아끼고 간직하고 싶어진다.

굴원이 한 말의 취지는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으로 부패한 세속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목욕을 통한 정화는 늘 자신을 돌아보는 수양과 검속(鈐束)의 정신과 통한다.

목욕을 하다 보면 자연히 때 생각을 하게 된다. 몸에든 마음에든 때가 끼어서는 청정과 평정을 유지할 수 없다. 함구납오(含垢納汚)라는 말은 때를 허용하고 더러운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말은 치욕을 참고 아니꼬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목표를 위해 인내하라는 것이지 때를 그대로 두라는 뜻이 아니다.

때 생각을 하면서 옛 시문을 찾아보았다.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 ‘소잠(小箴)’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울에 때 끼어 밝지 않아도/원래 밝지 않은 것 아니니/때를 제거하면 다시 밝아지고/물이 흐려 맑지 않아도/원래 맑지 않은 것 아니니/흐린 물 정화하면 다시 맑아지네/그대의 때 제거하고/그대의 흐림 정화하면/거울보다 밝고 물보다 맑은 그것/원래 상태 회복해 참된 삶 보전하리.“[鏡垢不明 未嘗無明 垢去則明 水渾不淸 未嘗無淸 渾澄則淸 去而之垢 澄而之渾 則有明於鏡而淸於水者 復其天而全其眞乎]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세숫대야에 대한 명[頮槃銘]’으로 이런 시를 지었다. “먼저 모습을 비추어 보고/그런 뒤 얼굴을 씻는다면/더러움이 숨을 데가 없으리라.”[先照影 次靧面 垢無所隱]

아니, 그러면 세숫대야에 비친 자기 얼굴도 한번 쳐다보지 않고 무조건 세수만 하는 사람이 있나? 요즘은 대야보다 더 잘 비쳐주는 거울이 있으니 자기 얼굴 살피기는 더 쉬워졌지만.

하여간 그래서 나도 때를 빼기로 했다. 그러나 스스로 때를 빼는 건 매우 서투르기도 해서 모처럼 때밀이, 이른바 세신사의 손을 빌리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연초라서 그런지 때를 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어쩌다 세신사의 손이 비는 날은 내가 시간이 모자라 열흘이 넘도록 때 빼고 광내는 일에 실패한 상태다.

그러나 좋다, 좋아. 어쨌든 나는 곧 때 빼는 데 성공할 것이다. 몸을 물에 잘 불리면 아마도 남들에게 손색이 없게, 아니 남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묵은 때가 밀려나올 게 뻔하고 틀림없다.

때를 밀려다 보니 전에 다니던 사우나에서 본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생각난다. 60대로 보이는 아버지는 키가 30cm는 더 큰 장신의 30대 아들을 목욕시키며 때를 밀어주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발달장애인 듯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이따금 외마디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는데, 체구가 너무도 건장해 더 안쓰럽고 더 비극적으로 보였다.

그 사우나가 문을 닫은 지금 그들도 이곳으로 목욕탕을 옮겼을까. 그러나 내가 여러 시간대에 갔는데도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동네에서 아버지가 팔을 잡아끌고 어머니가 뒤에서 등을 밀며 걷는 것도 엉망인 아들을 힘겹게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족은 언제까지 그러고 살아야 하나. 점차 늙어가는 그 아버지는 언제까지 아들을 씻겨줄 수 있을까.

세상에는 목욕탕이 없어 목욕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스스로 목욕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때를 빼고 안 빼고는 오히려 사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어쨌든 나는 곧 때를 빼고야 말 것이다. 나는 참 대단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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