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소설은 작가가 경험한 현실에 허구적인 상상력을 덧붙여서 미학적으로 쓴 이야기다. 소설이 예술 장르에 포함되는 이유는 ‘미학적’이라는 부분에 있다. ‘미학’은 많은 예술가나 철학가, 사상가들이 나름대로 정의하는 것들이 있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미학’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쓰려면 몇 권으로 써도 부족할 정도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주장하는 온갖 ‘미학론’이 이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소설이론에 해박하다고 해서 소설을 잘 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학은 그냥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 정도로만 이해해도 소설 쓰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쯤에서 ‘그럼 소설은 무조건 아름답게만 써야 작품성이 있는 거냐’ 하는 반문이 일어날 수가 있다. 이 말은 언뜻 이치에 맞는 말 같지만, 실전에서는 대단히 모호한 반문이다.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의 본질은 이데아(idea)라고 말했다. 칸트는 “아름다운 것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며 홀로 아름다운 것이며, 이미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즉, 아름다움의 본질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것도 배부른 철학자들이 꿈결처럼 중얼거리는 이론일 뿐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선(善)이다. 선, 즉 착함의 본질은 진실이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예술 감상자들이 예술품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작가의 순수한 혼을 공유할 때일 것이다.

“이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속을 빤히 들여다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래도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위 단편소설은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읽었을 황순원(1915~2000)이 1953년에 발표한 ‘소나기’이다. ‘소나기’는 특별하게 묘사를 잘했거나, 줄거리가 참신한 것도 아니다. 그냥 여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등학교 5~6학년 소년과 소녀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다. 그런데도 ‘소나기’를 읽으면 감동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머문다.

‘소나기’는 소설에서 아름다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한 번쯤 경험했음 직한 흔한 스토리다. 그런데도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상황이며 서사가 진실하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여운을 남게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김치는 약방의 감초다. 외국인들은 특별한 날에나 먹는다는 김치가 한국인들에게는 중독성이 있다.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김치를 먹고, 삼겹살도 김치에 싸 먹는다. 또 김치 피자도 있고, 김치전이며, 볶음밥, 김밥 등 수시로 먹는다.

김치는 갓 담갔을 때보다 어느 정도 숙성이 되면 더 맛이 있다. 글도 그렇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 휘갈긴 글보다는, 어느 정도 마음속이나 창작노트에 숙성을 시킨 주제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대체로 시(詩)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시어가 평이해지고 감각이 무뎌진다. 소설은 젊은 사람들이 쓰는 서사보다는 중년이나 장년층들이 쓰는 서사가 더 깊고 맛이 풍부하다.

주제를 김치처럼 숙성시켜야 좋은 글이 나온다면, 언제쯤 글을 써야 하냐? 하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소설 쓰기는 빠를수록 좋다. 당장 이 글을 읽고 나서 바로 시작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추천한다.

소설을 쓰다 보면 유난히 사연이 길거나, 반드시 이것만큼은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또, 대부분 처음에 소설을 쓸 때는 그런 부분부터 시작하기가 쉽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건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그런 부분일수록 계속 머릿속에 담아서, 혹은 창작노트에 개요를 기록해 놓은 것을 숙성시킨 다음에 쓰면 훨씬 좋은 글이 될 수가 있다. 다음 제18강은 ‘한눈에 띄는 제목 짓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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