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해마다 피는 꽃은 똑같은 모습으로 피어난다. 20대가 보는 하늘이나 50대가 보는 하늘이나 같은 풍경으로 구름을 안고 있다. 해마다 피는 꽃이며 늘 바라보는 하늘은 같지만,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은 다르다.

똑같은 꽃이라도 20대가 보는 꽃은 아름다움으로 보이고, 60대는 꽃을 바라보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상의 만물이며 돌아가는 이치도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다른 느낌, 다른 감흥으로 와 닿기 마련이다.

글을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 가성비가 좋은 글은 나이에 맞는 글을 쓸 때이다. 존재물이 내 마음에 아무런 여과 없이 와 닿는 그대로의 느낌으로 글을 쓰면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영화를 볼 때 대부분의 관객은 주인공이 된다. 눈은 스크린의 주인공을 쫓고 있지만, 주인공이 슬퍼하면 슬픈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주인공에게 행운이 찾아오면 관객도 행복한 얼굴로 웃는다.

일상적으로 꽃을 보거나 하늘을 볼 때의 느낌은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영화를 볼 때 주인공과 일치되는 기분은 나이를 초월한다. 그것이 영화가 주는 힘이다. 그 힘의 원천은 구체적인 영상과 주인공에게 집중이 되는 세계관이다.

소설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오히려 영화보다 주인공의 세계관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주로 시각과 청각에 주인공의 사상을 호소하지만, 잘된 소설은 오감(五感)을 동원해서 주인공의 세계관으로 독자를 편입시킨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다. 자전적 소설인 경우 작가 자신이지만, 일반 소설은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캐릭터이다.

박태원(1909~1986)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 집필)은 주인공인 소설가 구보 씨의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의 일과를 통해, 당대의 타락한 현실에 대항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소설가 구보 씨가 되어서 서울 거리를 걷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소설을 쓰는 것은 이처럼 가상의 현실에서 주인공이라는 한 인간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세계관과 현실의 경게가 뚜렷하지 못하고 현실과 오락가락하게 되면 독자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오정희(1947~ )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는 주인공인 ‘나’가 6·25전쟁 직후 항구 도시에 있는 중국인 거리에 살면서 겪는 성장소설이다. 2021년인 요즈음 ‘중국인 소설’을 읽어도 독자들은 전쟁 직후에 항구 도시에 있는 중국인 거리를 걷게 될 것이다.

처음 소설을 쓸 때는 주인공의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전적 소설이라 당연히 작가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경험의 세계라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론과 현실에는 공백(gap)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글을 쓰다 보면 주인공 중심으로 쓰다가도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쉽다.

소설은 단편이든 중편이든 소설에 들어가는 문장이나 에피소드는 반드시 스토리를 이어 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부속품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거리를 걷다가 따뜻한 햇볕이 드는 담장 앞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이를 묘사한다고 치자. 고양이 이야기는 그냥 원고지 매수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설 어느 부분에선가 따뜻한 햇볕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같은 존재가 있거나, 어떤 사건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소설을 쓰다 보면 자기감정에 깊숙이 빠져들어서 소설의 스토리를 이어가는데 필요하지 않은 에피소드나 문장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주인공의 캐릭터가 영혼을 잃게 된다. 세계관이 주인공을 향해 집중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다음 제16강은 ‘숨 쉬는 글쓰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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