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임팩트 임철순 주필] 요즘 페이스북에 20대 시절의 사진 올리기가 유행하는 이유는 뭘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회상하며 그때의 활력과 패기를 되살리려 하는 걸까. 이른바 ‘리즈시절’을 공개하고 남과 소통함으로써 코로나시대의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새로운 놀이일까. 온갖 범죄와 패악, 패륜과 막말로 찌든 세상에서 젊음의 순수를 동경하는 걸까. 아니면 이해인 수녀의 시 ‘내 나이 가을에 서서’라는 제목처럼 삶의 가을을 맞아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남들에게 관대해지고 싶어져서 그런 걸까.

누가 젊은 시절의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는 기본이고, 대단한 미남, 얼짱, 꽃미남이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나름대로 멋진 모습을 골라 그렇겠지만 젊음의 싱싱함과 풋풋함은 호감을 사기 마련이다. 복잡한 현실과 피곤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젊음을 소환하게 되는 것 같다.

카톡 사진에 1973년의 연필 초상화를 올린 전직 대사(72)는 해군 시절의 모습을 페이스북에 공개해 영화배우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젊어서 친구들이 서로 닮은 배우 하나씩 지정해주기로 했을 때 자기에겐 폴 뉴만(1925~2008)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니가 폴 뉴만이면 난 게리 올드만이야”라고 받아쳤다. 올해 63세인 게리 올드만은 폴 뉴만의 아들 뻘이긴 하지만, 성이 Newman 대 Oldman이니 내가 형님이라고 말한 셈이다.

         폴 뉴만(왼쪽)과 게리 올드만.
         폴 뉴만(왼쪽)과 게리 올드만.

67세의 다른 전직 대사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사진 두 장을 올렸다. 42년 전 스물다섯 살 때 친구와 함께 찍은 것과, 요즘 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세월은 우리라고 놔두지 않았다”는 설명을 붙였지만, 옛 사진과 비교하면 좌우가 바뀌었을 뿐 두 사람의 윤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카톡의 프로필 사진에도 42년 전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소설가로 데뷔해 최근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76)는 얼굴 사진이 아니라 초등학교 표창장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단기 4287년, 그러니까 1954년 계산초등 5학년 때 받은 ‘착한 어린이’상이다. 계산초교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에 있었으나 학생 수가 줄면서 다른 학교로 통합돼 지금은 없는 학교다. 김 교수는 “그 상을 받은 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라며 “상을 못 받았지만 다들 착하던 그때 그 동무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늙어갈까.”라고 썼다. 페이스북의 사진은 역시 과거를 되살리는 타임머신이다.

       김민환 교수가 공개한 ‘착한 어린이상’ 표창장.
       김민환 교수가 공개한 ‘착한 어린이상’ 표창장.

이런 걸 보면서 나도 20대 사진을 올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옛 앨범을 뒤지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보나마나 ‘순진무구’하지만 멀대 숙맥 같고 비쩍 말라 베트콩같이 시커먼 모습일 게 뻔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할까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붓글씨를 함께 배우는 동연(同硯) 중 한 분이 48년 전 스물두 살 때 내가 쓴 글을 찾아서 알려주었다. 나는 대학 4학년이던 1973년 봄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고에서 2주 동안 교생 실습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중앙고 교지 ‘계우(桂友)’에 쓴 교생수필 ‘계원(桂園)’의 2주일’이었다.

       1973년에 내가 쓴 글과 그 글이 실린 교지(아래).
       1973년에 내가 쓴 글과 그 글이 실린 교지(아래).

중앙고 출신인 그분은 집 안의 책을 정리하다가 내 글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무엇이든 자기가 쓴 걸 외우지 못하면 가짜 글이며 엉터리라고 생각해왔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 쓴 글을 지금도 잘 갈무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누가 주문을 해서 어떻게 쓰게 된 건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내 글은 엉망이었다. 그때, 교육은 매로 하는 거라며 교생 주제에 몽둥이를 들고 다닌 녀석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 친구에게 글을 쓰게 할 것이지. 중앙고에서는 선생님들이 교무회의 시간에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발언을 하고 있었다. 또 점심시간엔 학생들을 위해 팝송을 틀어주었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은 글이었다.

나는 당시 교생 실습을 앞두고 난생 처음 넥타이를 맸다. 누구에게 물어보는 숫기도 없어 하숙집에서 장시간 끙끙대며 혼자 넥타이 매는 법을 익혔다. 목을 조르는 이상한 물건을 매고 처음 밖에 나간 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마도 그 넥타이 하나로 2주일을 버텼던 것 같다. 잘 모르겠다.

어쨌든 1973년은 나에게 아주 의미깊은 해다. 연애는 계속되는 건지 중단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졸업 후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과 방황의 나날이 이어졌다. 하루 한 끼 하숙집 도시락으로 버티며 술만 퍼마시는 날이 많았다. 젊다는 것이 정말 싫었다. 젊음의 그 무분별과 흥분, 지나친 감정 소비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완성 내지는 성숙해지고 싶고 늙고 싶었다. 걷는 것, 말하는 것, 살기 위해서 음식을 씹는 것, 이 세 가지가 한사코 싫었다.

이듬해 나는 우리 나이 겨우 스물세 살에 신문기자가 됐지만 그 1년 사이의 내적 방황이나 진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출가는 물론 가출도, 동거도, 낙제도, 재수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젊음을 다 살아 보냈다. 갑자기 나타난 교생수필은 나의 20대를 이렇게 회고하고 확인하게 만들었다.

20대로 돌아간다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아마도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젊다는 게 싫다. 사실 젊어질 수도 없다. 도연명도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한창 젊은 때는 거듭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아침 되기 어려우니 좋은 때에 마땅히 힘써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

다시 이해인의 시로 돌아가보자. “젊었을 적/내 향기가 너무 짙어서/남의 향기를 맡을 줄/몰랐습니다.” 젊었을 때 내게서 무슨 향기가 났을 리 있나. 내 몸의 악취가 남의 향기를 맡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이 맞겠지. 젊은 시절의 사진은 다른 사람을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나 친구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젊음은 순수와 미완성과 가능성의 표상이긴 하지만 그 방황과 고민과 괴로움을 다시 겪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