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한만수 소설가,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

소설은 이야기다. 사전적인 의미의 이야기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이다. 혹은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주는 말이다.

소설에서 이야기는 사건을 뜻한다. 이야기도 그렇겠지만 사건도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바둑을 두면서, 혹은 밥을 먹으면서 대뜸 “땅벌의 침이 그렇게 독한 줄 몰랐어.”라고 뜬금없이 말한다면 듣는 쪽에서는 “왜?”라고 반문을 하거나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땅벌에 쏘인 사건을 말해주려면 땅벌이 있는 곳에 가게 된 경위를 먼저 이야기할 것이다. “작년에 벌초하러 고향에 내려갔었거든.”, 혹은 “지난주에 관악산으로 등산 갔었잖아.”라며 땅벌이 있는 곳에 가게 되는 연유부터 이야기를 꺼낸다.

소설이 시작된 후에는 반드시 써야 할 부분과, 대충 스케치만 하고 지나쳐도 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소설을 쓰다 보면 사건의 경중(輕重)이 구분되지 않게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서 환승하는 부분은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데도 매일 버스에서 지하철로 환승을 한 경험이 풍부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그 부분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가 있다.

상대적으로 반드시 써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그 부분은 기억이 희미해서 정밀 묘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청준(1939~2008)의 단편소설 ‘서편제’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소리꾼 남매의 아픔과 한을 서편제라는 소리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줄거리는 소리에 미쳐 살아가는 소리꾼과 그 딸의 이야기다. 단편소설인 만큼 독자들은 몇 개의 삽화만으로도 소리꾼의 한과 비극적인 삶을 엿볼 수가 있다. 서편제에서 소리꾼이 딸을 소리장이로 만들기 위해 잠든 딸의 두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은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이다.

자전적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게 된 과정, 눈물 나도록 슬프거나 분노했던 사건이나 서울 생활 20년 만에 내 집을 마련했다든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된 경위 같은 사건을 빠트리고 출간을 했다가는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된다.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을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사건의 중심을 장황하고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설을 쓸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스토리를 이어 나가는 데 급급해 큰 사건과 작은 사건들이 모두 같은 비중으로 보일 수가 있다.

소설을 완성한 후에도 무겁게 다루어야 할 부분과, 가볍게 다루어도 될 부분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어렵게 한 권의 소설을 완성했다는 뿌듯한 기쁨에 취해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물론 퇴고 전에 제3자가 읽어 보면 ‘왜 이런 대목을 장황하게 썼지?’라며 금방 알아차린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창작노트에 미리 경중을 체크해 놓으면 비교적 사건의 경중을 고르게 배분할 수가 있다.

윤흥길(1942~ )의 중편소설 ‘장마’는 성장소설로, 주인공 ‘나’는 서술자이며 관찰자에 머물지 않는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6·25전쟁 중에 일어나는 한 가족의 비극을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을 통해 보여주고, 그 비극을 극복해 나가는 소설이다.

윤흥길의 ‘장마’만 읽어봐도 6·25전쟁이 우리 민족사에 얼마나 큰 비극을 남겨 놓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자전적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도 200자 원고지 1000매로 ‘작가가 지나온 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어야 한다.

소설의 허구(虛構)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내는 일이다. 여기서 ‘사실처럼’은 거짓말이 거짓말로 읽혀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단순하게 허구를 앞세워 지나온 생을 미화만 시켜 놓거나, 시종일관 비극과 절망으로 점철시켜 놓으면 가장 가까운 독자인 가족들도 멀리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다음 제15강은 ‘주인공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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