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임팩트 임철순 주필] 전직 고위 공직자 중에 무슨 계기만 있으면 지인에게 붓글씨로 인사장을 써 보내는 분이 있다. 최근 이분이 ‘大象無形(대상무형) 辛丑年 象牙日(신축년 상아일)’이라는 말을 써 보냈다고 한다. 象(코끼리 상)이 衆(무리 중) 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대상무형’은 노자 도덕경 41장에 나오는 말이다. 지극히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즉 무한한 것은 오히려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세계 코끼리의 날’ 에 보낸 인사장 ‘대상무형’.
          ‘세계 코끼리의 날’ 에 보낸 인사장 ‘대상무형’.

상아일은 뭔가? 상아는 코끼리의 위턱에 있는 송곳니가 엄니 모양으로 길게 자란 것을 말한다. 알고 보니 이걸 써 보낸 8월 12일이 ‘세계 코끼리의 날’이었다. 코끼리 보호와 보전을 위해 2012년에 제정된 날에 맞춰 도덕경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보다 이틀 전인 10일에는 ‘日如年(일여년)’이라는 말을 써 보내왔다. 그날은 말복이었다. ‘(너무 더워서) 하루가 1년 같다’고 푸념을 한 것이다. 무슨 날, 무슨 절기마다 이렇게 붓으로 글을 써서 보내려면 쓰는 이나 받는 사람이나 한자 한문 공부깨나 해야 될 것 같다.

세계의 왼손잡이들. 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의 날이다. 
세계의 왼손잡이들. 8월 13일은 세계 왼손잡이의 날이다. 

국경일 기념일 공휴일 말고도 무슨 무슨 날은 전 세계적으로 정말 많다. 1년 365일 단 하루도 무슨 날이 아닌 날은 없다. 가까운 요즘 ‘날’부터 한번 꼽아볼까. 8월 13일은 왼손잡이의 날이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위안부 피해를 기려? 난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이다. 8.18 쌀의 날, 8.19 세계 인도주의의 날, 8.20 세계 모기의 날, 8.22 에너지의 날, 8.23 세계 노예무역 철폐의 날…이런 식이다.

‘날’에 관해 알아보니 ‘세상에, 이런 것도 다 있어?’ 싶은 게 많았다. 2.12 만년필의 날, 5.28 월경의 날, 9.26 피임의 날, 10.15 손 씻기의 날, 11.14 당뇨병의 날, 11.19 세계 화장실의 날…. 그러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날들도 있다.

1월 9일 책상 정리하는 날, 1월 16일 아무것도 아닌 날, 2월 1일 발가벗고 일하는 날, 2월 11일 친구 만드는 날, 2월 28일 공공장소에서 잠자는 날, 3월 23일 뭐든지 오케이하는 날, 5월 13일 개구리 점프하는 날, 6월 1일 뭔가 멋있게 말하는 날, 6월 2일 사무실에서 일찍 나가는 날, 6월 23일 개 끌고 출근하는 날, 7월 6일 세계 키스하는 날, 7월 19일 ‘메롱’ 하는 날, 8월 5일 개처럼 일하는 날, 8월 22일 천사가 되는 날, 8월 26일 개 칭찬하는 날, 9월 28일 멍청한 질문 하는 날, 11월 15일 냉장고 청소하는 날, 11월 24일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 12월 31일 결심하는 날.

그런가 하면 2월 8일은 웃어서 부자가 되는 날인데, 3월 19일은 다 함께 웃는 날이다. 7월 1일은 세계 조크의 날인데, 8월 16일은 조크를 하는 날이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은 세계 웃음의 날이다. 1998년 1월 11일 인도 뭄바이에서 시작됐다. 이날 웃자고 수백 개의 ‘웃는 사람 클럽’이 만들어지고 웃음 경연 대회, 요가에 웃음을 접목한 웃음 요가도 나왔다고 한다. 진짜 웃긴다. 우리는 4월 1일 만우절을 거짓말하는 날로 알고 있지만 4월 4일 거짓말하는 날이 따로 있다. 그것도 웃긴다. 날짜가 아니라 요일로 정한 것 중에는 9월 첫째 토요일인 ‘세계 수염의 날’도 있다.

3월 23일은 세계 강아지의 날이다. 그러면 고양이의 날도 있어야겠지? 8월 8일이다. 이 8월 8일은 건반이 88개인 피아노 데이이면서 무궁화의 날이기도 하다. 또 8월 8일이 ‘파파’와 비슷해 ‘아버지들을 위한 날’인가 하면 8.8이 포도 모양과 비슷해 포도의 날, 비눗방울 4개가 모인 모양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사람의 손과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의 날', 버블데이라고 한다.

달과 날이 같으면 이름 짓기에 좋다. 7월 7일은 세계 초콜릿의 날, 9월 9일은 귀의 날, 장기 기증의 날이고 10월 10일은 임산부의 날, 한방의 날이다. 11월 11일은 무슨 무슨 날의 ‘대목’이다. 눈[目]의 날, 가래떡 데이, 젓가락 데이, 빼빼로 데이이면서 지체장애인의 날이자 보행자의 날이다. 이날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 기념일이고, 아라비아 숫자 1111이 철로가 쭉 뻗은 모양을 연상시키는 레일데이다.

세계 여성의 날(3.8)이 있는가 하면 세계 소녀의 날(10.11)도 따로 있다. 성별과 나이로 차별받는 소녀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2011년 유엔이 제정했다. 한국에서는 유엔보다 먼저 2008년에 4월 셋째 수요일을 소녀의 날로 정했다. 그러면 ‘세계 소년의 날’은? 그런 건 당연히 없다. 남성의 날도 없다. 왜 없겠어? 그것은 왼손잡이의 날은 있지만 오른손잡이의 날이 없는 것과 같다. 다수자이거나 따로 보호해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어도 된다.

그래도 이런 건 왜 없을까 싶은 것들을 한번 나열해볼까. 세계 홀아비의 날, 세계 술꾼의 날, 세계 타짜들의 날, 세계 매 맞고 사는 남편의 날, 세계 비듬의 날, 이혼자의 날, 공처가의 날, 사위의 날, 동생의 날, 엉덩이의 날, 사타구니의 날, 붓글씨 쓰는 날…,

더 의아한 것도 있다. 6월 23일은 세계 사별여성의 날, 흔히 하는 말로 과부의 날이다. 2010년 유엔이 정했다. 2020년 6월 현재 세계에는 2억5900만 명의 과부가 5억8500만 명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과부 1억1500만 명이 가난 때문에 생존을 위협 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돌보자는 취지로 만든 게 과부의 날이다.

  이순재 씨의 ‘고아의 날’ 제정추진위원회 총재 취임식.
  이순재 씨의 ‘고아의 날’ 제정추진위원회 총재 취임식.

그러면 고아는? 국제 고아의 날 또는 세계 고아의 날을 제정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지 내년이면 10년인데 아직 이런 날은 없다.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은 고아 없는 사회를 갈망한 어머니 다우치 지즈코(田内千鶴子) 여사의 염원을 담아 이 운동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1월에는 한국 최고령 배우 이순재(86) 씨가 고아의 날 제정 추진위원회 총재로 취임했다. 매년 11월 두 번째 월요일을 고아의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맹자는 나라가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할 사람들로 ‘환과고독(鰥寡孤獨)’을 꼽았다. 늙은 홀아비, 홀어미, 부모가 없는 아이, 늙어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이 네 부류다. 그런데 유엔의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알다가도 잘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부모와 사별하고 고아가 되어서 죽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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