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민속박물관 상임고문 신탁근의 오종소호(吾從所好) 삶이 빛나는 까닭

온양민속박물관이 지금까지 해왔던 특별전시전 포스터 앞에 선 신탁근 온양민속박물관 상임고문. 사진 구혜정 기자
온양민속박물관이 지금까지 해왔던 특별전시전 포스터 앞에 선 신탁근 온양민속박물관 상임고문. 사진 구혜정 기자

그는 눈빛이 맑은 사람이다. 상냥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화하고, 깊은 관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버려진 돌부리 하나도 소중히 보고 결국에는 의미를 밝혀내는 일을 하는 사람, 신탁근 온양민속박물관 상임고문(74)을 만났다.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를 부르는 곳이 여전히 많아서다. 신탁근 고문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의 직책 말고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또한 우리의 ‘전통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등재추진단’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지난 4월 29일 프레스센터에서 발대식을 가진 이후 자료를 모으며 순조롭게 추진단을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물관 내부. 이곳에 있는 유물 하나하나 신 고문이 발굴한 보물 같은 존재다. 사진 구혜정 기자
박물관 내부. 이곳에 있는 유물 하나하나 신 고문이 발굴한 보물 같은 존재다. 사진 구혜정 기자

신 고문과 박물관의 인연은 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헌병으로 들어가 육군사관학교 교장의 책임 경비를 맡았다. 교장이 물러나면 육군박물관에 가게 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접하고 매번 다니다 보니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집에 가야금이 있었어요. 활도 갖추고 있어서 제가 어릴 적부터 줄도 다 닦아드리고 했습니다. 그때 익힌 것이 자연스럽게 취미가 되어 있었죠. 옛것을 평소 가까이 뒀던 터라 그런지 박물관에 있으면 너무 좋았죠. 당시 육군박물관 관장이 이강칠 중령이었는데 제대 무렵에 저를 데리고 인사동에 갔어요. 1970년대에 인사동을 접했고 유물 보는 안목을 키워나갔던 거죠.”

그는 1971년 군을 제대하고 3년여 동안 인사동을 학교 다니듯 열심히 다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신 고문은 스페인으로 유학 간 동생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였다.

“동생이 기타를 전공해 스페인에서 세고비아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습니다. 그래도 먹고사는 돈은 보내야 하잖아요. 내 살길은 오로지 유물 말고는 없었습니다. 제 생각은 계몽사와 자연스레 연이 닿았고 그 결과 온양민속박물관까지 오게 된 것이죠.”

유물을 찾아 다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유물을 찾아 다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내 인생과 다름없는 온양민속박물관

그의 인생 대부분은 온양민속박물관 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 박물관인 온양민속박물관은 1978년 10월 25일 처음 문을 열었다. 아동 교육 전문 출판사 계몽사 창업주 구정(龜亭) 김원대(金原大, 1921~2000) 선생이 학교 교육의 일환으로 박물관을 설립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구정 선생은 고향에 길원여자고등학교를 세우고 비슷한 시기 도서박물관 설립을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이 도서보다는 민속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며 민속박물관을 권유해 지금에 이르게 됐다. 신 고문은 계몽사에서 박물관을 연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1975년에 입사했다. 하지만 막상 박물관을 열려다 보니 박물관을 채울 만한 유물이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새마을사업이 진행되고 현대화에 집중하던 시기여서 그나마 관련 자료를 많이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장을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3명 한 팀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일단 유물을 수집하면 제가 정리했고, 다른 두 분이 인류학, 사회학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두 분 다 저보다 공부도 많이 하신 분들이셨고, 나이도 두 살 위였지요.” 

박물관 개관 당시 온양은 현충사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온양온천은 과거 인기 신혼여행지여서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많을 때는 연간 8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온양민속박물관을 찾았다. 
“유물과장, 전시과장, 학예실장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 1986년 4월 드디어 온양민속박물관 관장이 됐어요. 저와 함께 일하셨던 두 분은 교수가 되어 대학교로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학예사를 뽑아서 일하게 됐습니다.”

매년 특별전도 개최하고 알차게 박물관을 꾸려나갔다. 개관 5주년 때는 한중 흉배 특별전을 열었다. 한국 최초 해외유물 교류전이었다. 국립박물관 교류전은 물론 해외전시를 많이 했다. 일본 삼국사 전시, 동경 복장 문화대학 전시도 개최했다. 해외전, 국내전은 지금도 쉼없이 이어오고 있다. 박물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같은 전시회다. 국외문화재단이나 문화재청 산하 문화재연구소 해외반출 조사는 2013년도부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2002년에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이후 6개월간 제주 영화박물관에 관장으로 잠시 있었습니다. 해외반출 조사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지요. 민속 분야로는 크게 영국 대영박물관,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과 함부르크박물관,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등에 우리 유물이 많이 나가 있습니다.”

박물관 관장 출신, 대학교 입학하다

퇴임하고 나니 공부를 좀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2003년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문화교양학과가 생겨 1기생으로 입학했다. 유물을 대하는 안목이 국내 최고로 꼽히는 신 고문이 입학했으니 교수들이 당황해하지는 않았을까 궁금했다.

“마침 교수진을 보니 예전에 저에게 와서 자료 찾고, 도움 드렸던 분들이더군요. 그런데 방송통신대 공부가 만만치 않아요. 주로 방송이나 영상 강의로 공부하는데 출석수업을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딱 해외반출 조사 기간과 겹치면 출석을 못 해요. 과제 제출도 정말 힘들고요. 점수 받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토론 수업도 기억나고 공부했던 것이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그 어렵다는 방송통신대학교를 5년 반 만에 졸업했다. 학사학위를 받고 나니 또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방송대학교 다닐 때도 느꼈는데 교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우리 박물관에 있다가 안동대학교 민속학과로 간 배영동 교수한테 ‘나 그 학교에서 공부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오지 말라더군요.”
학업을 좀 더 하고 싶던 차에 마침 충남대학교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가 생겨 원서를 냈다. “면접을 보러 들어갔는데 지도교수 네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은 프랑스에서 음성학 공부를 하신 분이었고, 제 지도교수가 되신 분은 중국문학 전공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때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으로 문화가 넘어가는 과정을 말했습니다. 하나도 막힐 것 없이요. 며칠 후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나이 먹었다고 장학생으로 뽑아주더라고요.”

학교 다니는 4학기 내내 받은 장학금이 있어서 기분 좋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신탁근 고문이 "앞으로 우라나라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신탁근 고문이 "앞으로 우라나라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 구혜정 기자

“저는 이북까지는 못 가봤지만, 전국을 누비며 우리 문화에 가치를 입히고 찾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민속분야에서는 발품을 팔며 방방곡곡을 다닌 저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나 봅니다(웃음). 그리고 남들 따는 학예사 3급도 땄습니다. 여건이 되니까 나도 한번 봐야겠다고 했더니 문화부장관 직인이 찍힌 학예사 3급 자격증을 뒤늦게 받았습니다.”

은퇴한 뒤 모든 것을 역행하면서 살았다. 남들은 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실무를 익히고 자격증 따며 전문가가 됐다면, 신 고문은 현장에서 땀으로 일궈 익혀 그 분야 최고 자리에 오른 뒤 학교로 와서 찾아보고 확인하는 공부를 했다.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박물관

그가 정년 이후 2006년 다시 온양박물관으로 온 계기가 궁금했다. 지금까지 못 해본 것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돌아왔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는 내 살붙이와 마찬가지인 곳이거든요. 창립자 따님인 김은경 4대 관장이 취임하고 책임자로 오면서 저에게 물어보더라고요. 정리 못 한 유물도 정리하고 학예사 교육 등등 하면서 같이 일할 수 없겠느냐고요. 고문이라고 해서 큰 직책도 아닙니다. 박물관의 전체적인 일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합니다. 대외활동하고요. 관장과 가야 할 곳을 분담해서 가기도 하고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협업하는 거죠. 큰돈 받으면서 일하는 게 아니고 봉사입니다.” 

온양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 사립 최초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평수도 2만2000여 평에 이르고 유물 또한 2만5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8점은 정식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를 중심으로 생생문화재사업도 하고 박물관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해왔다.

온양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실을 걷고 있는 신 고문. 사진 구혜정 기자
온양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실을 걷고 있는 신 고문. 사진 구혜정 기자

무형문화재 위원장에 오른 것도 그간 그가 현장에서 다져온 감각이 빛을 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무형문화재위원회는 위원 27명과 전문위원 37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2년 임기에 연임도 가능합니다. 2018년에 문화재 전문위원도 안 해본 나에게 문화재 위원을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든 공예 부분에 있어 온양민속박물관 신 관장이라고 할 정도로 '일반화'가 되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문화재 위원을 해야 하냐 힘들 거 같다고 했는데, 공예 일반으로 항목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위원 2년을 하고 연장할 수 있어서 했는데 지난해 4월 30일 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제 분야에서 문화재 위원장까지 했으면 된 거 아닌가 싶습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배우고 좋아하며 산 것에 행복을 느낀다는 신 고문. 2남 1녀 공부시키고 두 내외가 병원 신세 안 지고 산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언젠가 전각장인인 석봉 고봉주(石峯 高鳳柱, 1906~1993) 선생이 저에게 논어(論語)에 나오는 오종소호(吾從所好)라는 글 하나를 주셨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인생 성공 길에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일이기도 했고 먹고살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가끔 ‘TV 진풍명품’ 프로그램을 보고는 “거기에 나오는 물건들 비싸던데 너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냐”고 묻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답변이다. 

“집에 그런 것을 가져다 놓는다면 박물관이 되겠어요? 집에 놓아둘 거면 골동품 장사 해야지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계몽사 사장이 나에게 박물관 열쇠를 안 맡겼을 겁니다.”

앞으로 신 고문이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은 바로 대한민국 한지를 유네스코 세계 인류 무형유산에 올리는 일인듯 싶다. 

“중국 선지, 일본 화지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입니다. 일본 화지는 담징이 종이 뜨는 법을 가르쳐 준 건데 유독 우리만 빠졌습니다. 우리나라 서원이나 사찰 등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리셨던 이배영 이화여대 전 총장을 영입했습니다. 그분의 노하우가 필요하니까요. 2026년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무형문화재 위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될 때까지는 모든 걸 허락하는 한 열심히 할 겁니다. 이것도 봉사죠. 나라를 위한 봉사입니다. 모두 한지 등재를 위해 관심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생각으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삶을 사는 신탁근 고문. 얼마나 탄탄하게 길을 다져왔는지 은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오종소호(吾從所好) 하는 삶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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