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지난 22일 입적(入寂)한 태공당(太空堂) 송월주(宋月珠, 1935~2021) 스님은 생전에 ‘토끼뿔 거북털’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는 건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이세멱보리(離世覓菩堤) 흡여구토각(恰如求兎角)’과, ‘능엄경(楞嚴經)’의 ‘토각귀모(兔角龜毛, 토끼뿔 거북털)’라는 말에서 뽑은 제목이다.

                          생전의 태공당 송월주 스님(1935~2021).
                          생전의 태공당 송월주 스님(1935~2021).

불교는 심산유곡에서 벽을 바라보며 도를 닦는 출세간(出世間)의 종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입세간(入世間)의 현실 문제에 참여해 사회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게 월주스님의 신념이었다. 현실문제에 부대끼며 도를 닦아야 한다는 한국 불교 사판(事判)의 대표 스님이 월주 대종사였다.

‘이판사판’은 조선시대 승려의 두 부류인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을 합친 말인데, 지금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판승은 주로 불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일하는 반면 이판승은 참선을 통한 수행에 주력한다. 이판승은 고고하기야 하겠지만 세상과 일머리를 모른다.

월주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를 실천한 사판승이었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우리민족서로돕기, 실업극복국민공동위원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집, 지구촌공생회 등을 통해 국내외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앞장섰다. “천경만론(千經萬論,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설)을 다 외운다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일”이라고 했던 설법 그대로다.

이런 자세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 역임했다. 첫 총무원장이던 1980년엔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지 않다가 ‘10·27 법난(法難)’을 겪고,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23일간 곤욕을 치렀다. 법난 뒤엔 한국을 떠나 3년간 미국과 구라파를 떠돌아야 했다. 1994년에 두 번째 총무원장이 되면서 조계종은 종정 중심에서 총무원장 중심 체제로 전환되고, 교구본사 주지를 임명제가 아니라 선거로 뽑는 제도가 정착됐다. 불교계에서는 “종단의 역사는 월주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다.

  7월 26일 금산사에서 월주스님 종단장 영결식이 2시간여 동안 열렸다.  사진 임철순
  7월 26일 금산사에서 월주스님 종단장 영결식이 2시간여 동안 열렸다.  사진 임철순

월주스님이 조실로 머물던 금산사에서 26일 열린 영결식과 다비식은 코로나와 폭염의 고통 속에서 치러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월주스님의 상좌이자 장의위원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의 영결사였다. 그는 “오늘 저는 은사이자 한국 불교의 큰 스승이신 태공당 월주 대종사를 적요의 세계로 보내드려야 한다”며 울먹였다. 스님도 별 수 없이 장례 때는 우는가 싶었는데, 그 자신도 “출가사문으로 생사와 별리의 경계는 마땅히 넘어서야 하겠지만 스승을 보내드려야 하는 이 비통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또 “대종사는 이 시대 진정한 보현보살이셨다”며 “1980년에는 광주로 달려가셨고, 최근엔 멀리 아프리카 지역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으며 어느 누구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절,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집을 조성해 할머님들을 정성껏 돌봐주셨다”고 회고했다.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은 법어에서 “대종사께서는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중생 교화를 위해 몸소 사바세계에 뛰어들어 중생과 함께하며 동체대비의 보현행원을 시현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법어에 인용한 예화 두 가지는 이미 지난해 10월 ‘자비순례’ 입재식에서 언급했던 것인 데다 법어 전체의 문장도 거의 그때 그대로였다. ‘이 뭣꼬’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2시간이 훨씬 더 걸린 영결식에서는 안숙선 명창이 판소리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부르기도 했다. 이어 다비장에서 스님들은 “불(佛)! 법(法)! 승(僧)!”을 외치고 거화(擧火)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선 “큰스님, 뜨거워요. 나오세요”라는 흐느낌도 들렸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이승의 인연이 다해 이제 막 떠나간 스님에게 왜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일까. 금산사 일대에서는 속히 사바세계로 돌아오시라는 펼침막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원행 총무원장도 영결사에서 “태공당 월주 대종사시여, 속환사바(速還娑婆)하소서”라고 외쳤다. 극락정토에 가서 머물려 하지 말고 이 세계로 속히 돌아와 중생 제도에 나서는 것이 다함없는 스님들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산사 입구에 내걸린 민간의 펼침막에 속히 돌아오시라는 말이 씌어 있다. 사진 임철순
     금산사 입구에 내걸린 민간의 펼침막에 속히 돌아오시라는 말이 씌어 있다. 사진 임철순

월주스님은 어느 설법에서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알게 모르게 공덕을 짓고 있다”는 말을 했다. “기자가 기사 한 줄 써도, 작가가 시 한 수를 읊더라도 그것이 언젠가 또는 누군가에게 더없이 행복한 기쁨과 희망이 될 거라고 확신하며 살면 된다”는 것이다.

1995년 6월 소설가 김동리(1913~1995)가 타계했을 때, 그의 오랜 벗인 서정주(1915~2000) 시인은 신문에 쓴 조사에서 김동리와의 여러 추억을 회고한 뒤 “동리야! 저승에서 부디 잘 지내다가 또 오너라!”라고 한 적이 있다. 하는 일이 무엇이든, 스님이든 아니든 사람은 누구든 죽고 나서 “어서 돌아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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