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세계적으로 차량용 반도체 품귀가 계속되는 가운데 첨단 반도체 분야가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이 와중에 이 분야의 한 전문가가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가장 중요한 기업”이라고 평가한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폭풍의 눈이 되고 있어 전후 사정을 살펴본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 한다. 그만큼 꼭 필요한 부품이기 때문이다. 쌀은 보리나 밀이라는 대체 곡물이 있으나 반도체는 대체 불가다. 각종 내구 소비재, 산업용 공산품에 반도체가 들어간다. 그래서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국이다. 대형 제조사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성능은 향상되고 가격이 낮아지면서 반도체 수요는 지속적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세계 반도체의 핵심 네덜란드 기업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고사양(高仕樣) 반도체의 생산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미국의 반도체 디자이너가 영국산 도구와 인도의 서비스 지원을 받아 반도체를 설계해 대만(또는 한국)의 주문생산자에게 보낸다. 그러면 생산자는 유럽으로부터 수입한 반도체 웨이퍼(wafer, 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 거기에 빛을 쏘아 회로를 새겨 넣는 노광(露光)장비, 일본에서 수입한 화학제품,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장비와 소프트웨어로 반도체 웨이퍼를 마감, 생산한다. 다음 단계인 조립과 포장은 말레이시아에서 한다. 그리고 최종 검사 단계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이 생산하는 장비가 사용된다.

이렇게 생산된 반도체를 중국이 제일 많이 수입해 쓰고 있으니 중국이 자체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동안 중국은 반도체를 ‘제조 2025’ 국책과제의 중점 분야로 정해 엄청난 재원을 들여 자체 생산 능력을 키우는 ‘반도체 굴기(崛起)’사업을 추진해왔지만 아직까지 한국이나 대만의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의 관계를 전략적 경쟁관계로 정리한 미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제외하는 반도체 생산 네트워크를 미국에 구축하고 싶어 한다. 미국은 반도체가 대부분 동북아에서 생산되는 것이 불편하다. 잠재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 기업들뿐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 등도 참석했던 올 4월 백악관 ‘반도체 화상회의’의 배경이다.

미국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고사양 반도체를 만드는 것도 원치 않는다. 며칠 전 보도된 바와 같이 미국은 네덜란드에 반도체 핵심 장비를 중국에 팔지 말도록 요구했다. ASML은 전술한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빛을 쏘아 회로를 새기는 노광장비를 만드는 기업이다. 이 기업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대당 가격이 1700억 원을 상회하는데 운반하려면 보잉 747 화물기 3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1년에 40~50대만 생산되는 이 장비는 웨이퍼 원판에 조밀하게 회로를 새길 수 있어 고사양 반도체 생산업체에 필수적이다. 중국이 유사 장비를 자체 개발하려면 10년이 소요된다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지난해 10월 펜데믹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이 네덜란드로 해외 출장에 나선 것은 이 장비 확보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중도 ‘협동 네트워크’ 못 만들어

1984년에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미국의 ASM International의 합작법인으로 출발한 이 기업은 짧은 기간에 세계 반도체 시장의 핵심 기업으로 부상했다. ‘해가 지지 않는 기업’이라는 말도 듣고 있다. 자체적 기술 개발보다는 전향적으로 관련 기업들의 첨단 기술을 흡수해 이루어낸 결과이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사에 인용된 CEO에 따르면 설립 이후 자금력이 부족해 자체 개발이 용이치 않자 외부의 기술 개발에 의존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협동적 지식 네트워크’를 이루었다고 한다. 광학기술은 독일 회사 자이스에서, 발광(發光)장비는 미국에서, 공정에 쓰이는 화학약품은 일본에서 조달해 만든 것이 EUV노광장비이다.

ASML 매출의 약 17%를 차지하는 중국은 이 첨단 장비를 자신들에게 팔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NATO 우방국인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중국에 팔지 말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고삐를 더 조이고 있다.

ASML은 강대국 미국과 중국도 독자적 반도체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발상의 전환은 국력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반도체 품귀는 주요 공급처인 우리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중·장기적으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도 있다. 바람직한 미래상은 우리 기업들이 ASML과 같이 혁신적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성공에는 회사 밖 기술을 포용하는 열린 기업문화가 필수적이었다. 기업이 입지한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게 기업문화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폐쇄적 사회는 우리 기업들에게도 짐이 될 듯하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