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옛이야기 한 토막. 추위가 매서운 한겨울 밤, 아이를 사이에 두고 부부가 누워서 주고받은 말.

-당신, 그쪽 춥지 않아?

-(괜히 감동한 마누라) 아니요, 안 추워요.

-그래? 그러면 나랑 자리 바꾸세.

#요새 이야기 한 토막. 어린 아들의 몸이 불덩어리같이 뜨겁다. 이틀째 학교도 못 가고 앓고 있다.

-너무 안쓰러워.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옴마나, 당신도 그래?

-응, 나도 당신이 아팠으면 좋겠다고…(퍽, 쿵! 아내한테 맞고 쓰러지는 소리.)

#내 경험담 한 토막.

수습기자 시절, 나는 2진 경찰서 기자실에 ‘파우스트’ 대역본을 갖다 놓고 읽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 들른 1진 선배가 물었다. “이거 당신이 읽는 거야?” “(자랑스럽게) 네(전 공부하는 기자잖아요).” 그는 그러냐고 했다.

며칠 후, 무슨 기사인지 빠뜨렸다(낙종! 물을 먹은 것이다). 그 선배가 이랬다. “다앙~신 말이야, 그렇게 책이나 읽고 앉아 있을 거면 대학원 가지 뭐 하러 신문사 들어왔어?” 고개도 못 들고 무참히 깨졌다(당신이라는 말 정말 싫어).

당신이라는 말은 쓰임새가 많다. 1)듣는 이를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 “이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같은 말. 2)부부끼리 “여보, 당신” 하는 2인칭 대명사. 3)문어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2인칭 대명사.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사실들’ 이런 것. 4)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2인칭 대명사. “뭐? 당신? 누구한테 당신이야?” 5)‘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3인칭 존칭. ‘어머니는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신다.’ 같은 용법.

당신이라는 말을 대놓고 쓰면 싸움이 나기 쉽다.  
당신이라는 말을 대놓고 쓰면 싸움이 나기 쉽다.  

내가 위에서 예로 든 사례는 부부간의 대화건 질책이건 다 2인칭이다. 3인칭에도 높임말만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이청준의 소설 제목 ‘당신들의 천국’에서 ‘당신들’은 비난과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소록도의 한센씨병(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당신들에게 천국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사람들이 사실은 당신들(자기네)의 천국을 만들 위험이 있다는 말을 한 제목이다. 1970년대의 우리 정치 현실과 개발독재의 실상을 알레고리 형식으로 차용해서 쓴 작품이다.

그런데 최근 2인칭과 3인칭 ‘당신’이 만나 한바탕 활극 내지는 소극을 빚은 일이 있다. 지난 13일 밤,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을 위해 열린 국회 본회의.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외교행낭을 이용한 부인의 밀수행위는 명백히 외교관 직위를 이용한 범죄행위”라고 비판한 게 발단이었다.

연설이 끝난 뒤 더불어민주당의 문정복, 홍기원 의원이 정의당 의원들이 있는 자리에 찾아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따졌다. 배 원내대표가 “그러면 장관 후보자가 왜 사퇴했냐”고 반문했다. 이 대목부터가 문제다. 문 의원은 “그거야 당신이 국정에 부담을 주기 싫으니 자진 사퇴한 것”이라고 말한 거라고 나중에 주장했다.

그런데 TV방송사 녹음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다. 문 의원은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랑…”이라고 시비를 걸었고, 옆에 앉아 있던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발끈해 따지고 나섰다.

류)“당신?”

문)“야!”

류)“야?”

문)“어디다가…”

류)“어디다가라뇨. 우리 당이 만만해요?”

문)“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

류)“목소리는 민주당이 더 많이 내셨죠.”

문 의원은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면서도, '당신'은 박 전 후보자를 지칭한 것이지 배 원내대표에게 한 표현이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난 3인칭을 이야기했는데 넌 왜 2인칭으로 대드냐는 이야기였다. 문재인 대통령비서실 선임행정관 출신인 문 의원은 같은 초선이긴 하지만 류 의원보다 스물다섯 살이 많다. “야”라고 해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은 문 의원에 대해 17일 SNS 글을 통해 “지난해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이 질의할 때면 손가락질을 하고, 옆자리 의원 등과 귓속말을 하면서 내놓고 비웃고, 고함을 질러댔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의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은 누구죠?'(Who R U)의 시사회 포스터. 작가들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의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은 누구죠?'(Who R U)의 시사회 포스터. 작가들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싸울 때 흔히 쓰는 말 ‘당신’은 영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다른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억양이나 강세로 알게 할 수밖에. “어디다”는 바꿔 말해 “얻다 대고”인데, 영어로 뭐라 해야 되지? “How dare you(talk to me like that)?”인 거 같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니가 감히” 이런 말이다.

말을 멋대로 갖다 붙이는 내 영어로는 “How do you do?”도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얻다 대고 감히)”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Nice to meet you”를 “너 잘 만났다”, “See you later”를 “두고보자”로 해석하는 걸 응용하면 “뭐가 어쩌고 어째?”는 “What is how and how?”가 된다. 최근에 본 어떤 만화에는 “Listen, listen, I can’t listen”이라는 것도 있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들어주겠구만.”이라고 한다.

요즘 만들어진 말 중 히트작은 “당신은 도덕책”이다. ‘도대체’가 ‘도덕책’과 발음이 비슷해서 생겨난 감탄사라고 한다. “당신은 도덕책 틀려먹었어.”, “당신들은 도덕책 부제굴능(구제불능)이야.” 이런 식으로 써먹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이건 누구건 당신들 때문에 정말 어이가 없어. 도덕책을 끌어다 대며 혀를 찰 일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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