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설거지는 왜 하지? 밥을 또 먹으려고 하지. 밥을 먹고 난 뒤 다음 식사를 위해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 정리하는 일이 설거지 아닌가. 예전엔 설겆이라고 썼는데, 언젠가부터 맞춤법이 바뀌어 설거지가 됐잖아? 쓰기에는 좀 편해졌지만 왜 바꿨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나는 지금 설거지라고 쓰면서 거지를 생각하고 있어. 거지도 설거지는 할라나? 좀 깔끔하거나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거지는 깡통을 열심히 닦을 테지만, 세수할 물도 없는데 그것까지 닦겠어? 밤중에 깡통을 막 차면서 걸어가는 거지에게 시끄럽다고 하자 그 거지가 이 동네 인심이 고약해서 이사 가는 중이라고 했다지? 그걸 보면 거지는 설거지를 하지 않고 사는 게 거의 분명해. 하기야 지금은 거지도 1회용 용기를 이용하지 깡통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모란(오른쪽)이 지더니 작약이 피면서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사진 임철순
모란(오른쪽)이 지더니 작약이 피면서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사진 임철순
할미꽃 갓털은 비행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사진 임철순
할미꽃 갓털은 비행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사진 임철순

설거지는 좋은 말이야. 우리말에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게 참 많아. 그런데 묘한 것은 설거지는 원래 사후에 하는 건데, 비설거지나 눈설거지와 같은 말은 그 반대거든. 비나 눈이 오려 할 때 물건을 미리 치우거나 덮어서 비나 눈을 맞지 않게 하는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말설거지, 글설거지 같은 말도 있을 법한데 이런 건 왜 없을까? 요즘처럼 정치인이건 누구건 말을 함부로 해대고 아무렇게나 SNS에 찍찍 갈겨 쓰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이런 설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텐데.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구? 일단 글을 쓰거나 말을 내뱉으셔. 그러고는 이건 나중에 취소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말설거지용이나 글설거지용이라고 미리 밝혀두는 거야. 인터넷에서 잊혀질 권리인지 잊힐 권리인지 무슨 그런 권리는 따질 필요도 없게 될 텐데.

사랑설거지는 또 어떨까? 남녀가 썸을 타다가 연애를 하고 사랑을 맹세했다가 금세 헤어지고 만인의 관심 속에 결혼을 했다가 갈라서는 건 지금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 아닌가? 늘 밥을 먹듯 아무것도 아니고 흔한 일이라는 말이지. 요즘 기사를 보면 남녀 간에 누가 누구랑 사귀면 ‘연애’도 아니고 바로 ‘열애 중’이라고 보도되곤 하던데,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보면(사실 기다린 것도 아니지만) 성격 차이라나 뭐라나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건전한 친구관계는 앞으로도 유지한다나 뭐라나 그렇게 나오곤 하던데. 이런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설거지도 필요한 거지.

밥그릇에 들어앉은  강아지. 몸은 묶여 있지만 자유로워 보인다. 설거지는 사람의 몫이다.
밥그릇에 들어앉은  강아지. 몸은 묶여 있지만 자유로워 보인다. 설거지는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내가 설거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건 봄을 보내기 위해서야. 5월 12일은 음력 4월 초하루. 한자어로 표현하면 4월은 여름의 시작인 초하(初夏), 맹하(孟夏), 수하(首夏)야. 청화절(淸和節)도 좋은 이름이지. 어느새 봄은 다 가고 여름이 시작된 거야. 5월 5일이 입하(立夏)였고, 21일이 소만(小滿)이잖아. 농가월령가에 이렇게 나오지 않던가.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그러니 내년에 다시 또 봄을 잘 맞도록 올해 ‘봄설거지’를 깨끗이 해야 되겠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삼월 그믐날 이런 시로 사람과 봄을 함께 배웅했더군.

오늘이 바로 삼월 그믐날인데 今日正當三月晦

봄을 보내며 그대까지 보내네 送春兼復送君歸

봄이 돌아오기 전에 그대 먼저 오겠지 春未回時君正返

이정에서 굳이 석양을 원망할 거 있나 離亭不必怨西暉

이정(離亭)은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한잔 나누는 정자를 말하는데, 굳이 정자가 없더라도 작별하는 장소로 쓰이는 말이라고 해.

이번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시.

봄에게 물어보자 무슨 일로 무정하게 問春何事不留情

뭇 꽃을 거두어 놀란 듯 훌쩍 떠나 收拾繁華去若驚

꽃 지고 버들개지 날려 온통 적적하여 花落絮飛都寂寂

새벽 창의 자규 소리 시름겹게 하는가 曉窓愁絶子規聲

 

봄이 답하네 사람아 박정하다 원망 말라 春答人休怨薄情

네 계절이 도는 건 놀랄 필요 없는 일 四時相代不須驚

녹음 짙은 정원 안에 서늘한 기운 좋아 綠陰庭院微凉好

누운 채 빗소리 듣기 아주 괜찮을 거야 高枕還宜聽雨聲

봄이 가도 여름의 즐거움이 있으니 그런대로 계절에 적응해 잘 살라는 말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시 ‘송춘(送春)’은 한층 더 구체적이다.

봄을 보낸들 봄이 어디로 가랴 送春春何去

봄이 옴은 어디에서 말미암나 春來甚處因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니 無來亦無去

저절로 매한가지 봄이라네 自有一般春

이 짧은 시에 춘(春)이 네 번이나 나온다. 전체 스무 자 중 5분의 1이다. 사시장춘(四時長春)을 염원하는 봄설거지가 요란한 셈이다. 이렇게 봄날은 간다. 아니 봄날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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