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전남 완도군 청산도(靑山島)는 사시사철 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엔 신선이 산다는 ‘선산도(仙山島)’, ‘선원도(仙源島)’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서편제’(1993)가 공전의 대성공을 거둔 데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2007.12)되면서 청산도는 매년 30만 명 이상이 찾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광명소가 됐다.

지난달 24일에 가본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청청하고 시원한 풍광이 인상적이었다. 맑고 푸른 다도해와 조화를 이루는 그 섬은 어디에 카메라 초점을 맞춰도 다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졌다.

‘서편제’의 명장면을 촬영한 청산도 길이 저 앞에 보인다.  사진. 임철순.
‘서편제’의 명장면을 촬영한 청산도 길이 저 앞에 보인다.  사진. 임철순.

그런데 맨 먼저 발길이 닿는 서편제공원에서 눈길을 잡아끈 것은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흉상이었다. 섬의 전설에 얽힌 인물이거나 섬을 발견한 분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전 완도군수의 흉상이었다. 흉상 옆엔 “작은 섬 완도를 국민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지역으로 탈바꿈시킨 열정과 헌신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헌사와 함께 2002년부터 내리 3연임한 군수의 이력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흉상까지 세운 걸 보면 청산도를 위해 큰일을 한 분일 텐데, 아쉽게도 이미 고인이 됐나 보다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생사당(生祠堂)이라고 하는 말에 빗대면 그것은 생흉상이었다. 흉상의 주인공 김종식 전 완도군수(더불어민주당)는 2018년부터 목포시장으로 재직 중인 인물이었다.

흉상이 제막된 것은 2013년 7월 3일, 당시 김 군수는 제막식에서 흉상의 흰 천을 직접 걷어내고 자기 머리 옆에 서서 기념촬영도 했다. 주민들이 1만~100만원씩 기금을 내고, 청산농협도 참여하는 방식으로 8200만 원을 모아 제작한 흉상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김 전 군수는 “쑥스러워서 극구 사양했고, ‘정 고마운 뜻을 표현하려면 퇴임 이후에 추진해 달라’고 설득했는데 막 밀어붙이시더라”고 말했다 한다.

당시 한 지방신문의 보도를 인용하면 경위는 이렇다. “면민의 날 행사 때 청산도 발전에 힘쓴 김 군수의 흉상 건립 얘기가 나온 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성금 모금 운동이 시작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문제는 흉상 당사자인 김 군수의 반대였다. 김 군수는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무슨 흉상이냐’며 완강하게 고사했다. 자문위원들에게 전화해 건립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군수는 주민들의 고마운 마음만을 받겠다고 버텼지만 허사였다.”

2013년 7월 자신의 흉상 옆에 선 김종식 당시 완도군수.
2013년 7월 자신의 흉상 옆에 선 김종식 당시 완도군수.
  2021년 4월에 촬영한 흉상. 사진. 임철순.
  2021년 4월에 촬영한 흉상. 사진. 임철순.

이듬해 군의회에서는 흉상 건립 추진과정에서의 농지 불법전용과 행정재산의 불법 사용 문제가 불거져 철거하거나 다른 장소로 이전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었으나 완도군은 그대로 두었다. 군의회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 흉상은 지방 관료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頌德碑)나 다름없다. 송덕비는 유애비(遺愛碑) 선정비(善政碑)라고도 부른다. 송덕비의 효시는 전남 순천시의 팔마비(八馬碑)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昇平, 순천 지역의 옛 지명) 부사였던 최석(崔碩)이 이임하자 백성들은 관례대로 말 8필을 선물했다. 하지만 최석이 폐습이라며 개경으로 가는 도중 태어난 망아지까지 9필을 돌려보내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불렀다.

후대에 갈수록 송덕비는 이름을 남기려는 지방 관료들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했다. 송덕비 건립을 강요하는 관리의 악정(惡政)에 대한 분풀이로 비사치기(비석차기) 놀이가 생겼을 정도다. 조선시대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은 아버지 송덕비를 세우려고 돈을 뜯어내다가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다.

그러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안의(安義, 경남 함양군) 현감에서 물러난 몇 년 뒤, 그곳 사람들이 구리를 녹여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하인들을 보내 깨부숴 땅에 묻고 감영에 고발하겠다”고 해 중지시켰다. 연암은 “이름이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는 강원도를 안찰(按察)할 때 삼척의 바닷가 높은 언덕에서 쉬었는데, 백성들이 그곳을 소공대(召公臺)라고 부르며 비(碑)를 세워 기렸다. 이때 관동의 백성들이 송덕비도 세울 것을 도모하자 이를 엄금했다.

공주 공산산성 입구에 즐비한 송덕비. 마음에서 우러나 세운 송덕비가 몇 개나 될까. 사진. 임철순.
공주 공산산성 입구에 즐비한 송덕비. 마음에서 우러나 세운 송덕비가 몇 개나 될까. 사진. 임철순.

송덕비를 둘러싼 논란과 말썽은 조선조 내내 계속됐다. 1684년(숙종 10) 형조판서 박신규(朴信圭, 1631∼1687)가 지방에서 비석을 세우는 폐단이 있으니 엄금할 것을 아뢰자 숙종은 계묘년(1663) 이후 비석을 세운 수령을 각별히 신칙(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게 했다. 그 전해에 현종은 송덕비를 세운 경우 후임자가 사실을 조사해 죄를 다스리도록 한 바 있다. 1732년(영조 8)에도 우의정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 “수령이 명예를 구하여 송덕비를 세우려 하니 폐해가 많다”며 금할 것을 청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이렇게 썼다. “고을 백성이 나무로 송덕비를 만들어 세우거든 바로 뽑아서 공고(工庫)에 저장해 두었다가 큰 것은 상(喪)을 당하고도 관(棺)이 없는 백성에게 주고 작은 것은 초합이나 떡합 등 자잘한 기구를 만들어 써서, 다시 백성의 동산에서 재목을 요구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영조는 “수령에 대해 송덕비를 세우는 것도 참으로 폐습인데 읍민이 궐로 나아가 잉임(仍任, 기한이 찬 벼슬아치를 그대로 머물게 함)을 청하는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라는 신하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송덕비를 세우거나 잉임을 청하는 일을 어찌 모두 수령이 그렇게 하라고 권유했겠는가. 그렇지만 수령이 알려지기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직접 권하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스스로 행한 것과 다를 바 없다.”(승정원일기 영조 11년 을묘 11월 30일)

그러니까 송덕비든 흉상이든 사람들이 자기를 기리려 하면 한사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말려야 마땅한 일이다. 송덕비보다 더 좋은 것은 구비(口碑, 여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소리를 해 마치 송덕비를 세운 것 같다는 뜻)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익산 화산(華山)서원 봉안문에 이렇게 읊었다.

선비들은 전수받은 심법 외우고[士誦心法]

백성들은 칭송하여 구비 세웠네[民有口碑]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길이 칭송을 받는 게 낫지 모처럼 찾아간 관광객들이 끌끌 혀를 차거나 욕을 하고, 날아가는 새가 똥이나 갈기는 게 뭐가 좋을까. 물론 청산도를 위해 큰 업적을 남겼지만, 영조의 지적을 빌려 말하면 흉상은 주인공 스스로 만든 것과 다름없다. “김 군수는 주민들의 고마운 마음만을 받겠다고 버텼지만 허사였다.”는 기사가 더 우습다. 군수도 그렇고, 기자도 그렇고 참 웃긴다. 다투어 청산도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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