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실 ‘트롯의 부활: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 저자

김장실 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
김장실 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

나는 최근 ‘트롯의 부활: 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라는 책을 냈다. 1920년대 한국 대중음악 탄생 이후, 시련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들에 담긴 시대정신과, 관련된 정치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거시적으로 탐색한 책이다. 인기 가요의 작사가, 작곡가, 가수, 음반 제작자와 팬들 사이에 있었던 연예사적 에피소드도 동시에 연결해 살펴보고 있다.

책은 이번에 발간됐지만 사실은 그동안 60여 년간 내 삶과 함께 성장해온 분신이나 다름없다.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에서 유학하던 중 우연히 미국인 등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국 대중가요의 정치사회학(The political sociology of the Korean popular song)'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하였다. 여러 대학교와 지자체, 사적 모임 등에서 많은 강의를 하면서 한국 대중가요에 관한 내 나름의 입장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얻었다. 이런 과정에서 특이한 인연을 만나 국회의원을 하던 2015년 11월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도 했다.

문화체육부 차관이던 2008년엔 구체적 출판계획이 잡히기도 했으나 바쁜 일에 쫓겨 마무리를 하지 못하다가 지난해 8월부터 준비해 이번에 발간하게 되었다.

삶의 애환 담긴 히트곡은 바로 우리의 시대사

나는 어려서부터 노래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트로트와 애환을 함께해왔다. 어디 나만 그런가? 우리나라 시니어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본다. 2년 전부터 트로트 열풍이 번져 인기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시니어들의 호응이 큰 요인인 것 같다.

TV조선은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위시한 트로트 경연프로그램으로 이 열풍을 주도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의 중심에 서자, 다른 방송사에서도 유사 프로그램이 여러 개 방영되고 있다. 바야흐로 트로트가 부활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30년 이상 트로트는 소수의 나이든 어른들이 좋아하는 마이너한 대중음악의 장르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 젊은 사람을 포함하여 전 국민이 부르고 즐기는 음악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트로트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맞아 트로트라는 대중음악의 장르를 새로이 조명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생각한다. 그간 트로트는 저급한 애상이 주조를 이루는 신파조 노래라는 천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러한 경멸어린 시선 속에서도 트로트를 좋아하며, 이를 고독하게 지켜온 시니어 세대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왜 이런 노래들을 좋아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시니어들은 한국사회의 기적적인 발전을 주도해 왔다. 상전벽해에 비견될 만한, 눈이 핑 돌고 어질어질하며, 세계사에서 기록될 만큼 역동적인 변화를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배, 해방, 6·25전쟁, 대중적 빈곤, 경제 근대화, 민주화 등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었다. 어쩌면 그들이 살아온 세월은 긴 인고의 시간과 짧은 환희가 교차하는 신산의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한 것이 일제 때 이식되었지만 한국인의 심성에 어울렸던 트로트라는 노래였다.

트로트가 이렇게 한국인의 심성에 맞게 된 것은 한국인이 그간 겪은 삶과 이 노래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 시대에 인기를 구가한 가요는 그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정신은 그 시대에 일어났던 거대한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빚어내는 문화적, 정신사적 상징이다. 그리고 당대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기에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트로트는 그 당시로는 모던보이와 모던 걸 등 엘리트층이 선호하던 노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회의 하층민 등 소위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한국 대중가요는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드러내는 노래가 많아, 한국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애수의 소야곡’, ‘번지 없는 주막’,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이 시절 일제의 학정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들이다.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자 그 기쁨은 한량이 없었다. 이때 해방의 환희를 드러낸 노래들이 여러 곡 나왔다. 그중에서 새로운 나라 건립의 포부를 담은 ‘귀국선’은 가사나 곡의 구성, 그리고 인기도에서 최고였다. 그러나 남북분단이 현실화되자 남인수가 부른 ‘가거라 삼팔선’이 히트하였다.

1950년대 우리 민족의 최대 시련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다. 이 전쟁은 우리 민족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다. 상상할 수 없는 인명의 살상과 재산의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이 해가 떠오르기 전에 떨어지듯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전쟁과정에서 죽자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전쟁기간 중 ‘전우야 잘 자라’, ‘아내의 노래’, ‘임 계신 전선’ 등과 같은 진중가요를 한국인들은 많이 불렀다. 3년의 전쟁 끝에 정전협정이 맺어지자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환도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한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50년대 중반, 전후 복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생계가 막막한 50만의 전쟁미망인과 10만 전쟁고아들의 힘들고 서러운 삶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크나큰 사회문제였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돌봐주는 이 없는 전쟁고아들의 불행한 처지를 직시하는 ‘생일 없는 소년’과 ‘가는 봄 오는 봄’ 등 고아 노래가 히트하였다. 아울러 점점 권위주의 정치 행태를 보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하여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급서와 관련, ‘비 내리는 호남선’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린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촌 출신 젊은이들이 희망의 상징인 도시로 가서 열심히 일하여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김용만의 ‘회전의자’가 히트하였다. 그러나 성공한 농촌출신 남자들은 과거의 여인을 버리고 도시의 양가집 규수들과 결혼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이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도시로 상경할 날만 기다리던 농어촌 여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처럼 도시로 간 남자의 출세로 인해, ‘섬’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살고 있는 농어촌 출신 여인은 사회적 거리감의 표상인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된다.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을 통해 남자로부터 배신당한 여인의 이러한 절망적 심리상태를 노래하여 한국 대중가요사상 초미의 히트를 하였다. 이와 함께 1960년대 말과 1970년 초에 히트한 남진의 ‘가슴 아프게’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도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노래들이다.

1965년 월남파병과 1970년대 초의 중동건설로 한국사회의 국제적 이산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자녀들의 조기유학으로 엄마와 아이들은 외국으로 가고 홀로 고국에 남아 있는 ‘기러기 아빠’가 증가했다. 기러기 아빠들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 힘들게 돈을 벌어 외국으로 송금했다. 이들은 이역만리 외국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지나친 음주와 고독감에 시달렸다. 기러기 아빠들의 병고와 자살 등 가정해체가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1969년에 나온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는 한국사회에서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와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한 결과 197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기적을 이룩하였다. 이런 엄청난 성과를 정부 차원에서 홍보한 노래와 영화가 ‘잘 살아보세’와 ‘팔도강산’이다. 이런 관제 가요보다 작사가와 작곡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박정희 정부의 경제근대화 작업의 성과를 노래한 것이 바로 남진의 ‘님과 함께’이다.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와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강압적인 통치가 있었다.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노래가 이 시절에 나와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데모현장과 대학생 MT 등에서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많이 불렀고, 일반인들은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많이 불렀다. 한편 1970년대 중반 추진된 재일 조총련계 동포 모국방문사업과 관련하여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인기를 끌었다.

또한 1983년 초반 정전협정 30주년을 기해 KBS가 추진한 이산가족방송이 공전의 히트를 했다.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곡으로 사용된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 1970년대부터 강남개발이 본격화되어 1980년대 강남은 서울의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했다. 특히 강남이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런 유흥풍속도를 경쾌한 리듬과 간드러진 창법으로 잘 그린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이 인기를 얻었다.

이젠 젊은이들도 선호하는 ‘민족의 노래’로

그러나 1990년대가 되면 트로트는 소수의 시니어만 좋아하는 장르가 되어 있었으며, 라디오와 TV는 발라드, 랩송 등 젊은이들 취향의 노래만 방영하였다. 이렇게 방송에서 사라진 트로트는 밤무대 업소, 칠순잔치, 고속도로 휴게소나 정치인의 유세현장 등에서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신파적 비극미가 있는 트로트는 노래방에서 나이가 제법 든 시니어들은 물론 40세를 지난 장년들로부터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젊을 때 밝고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을 즐기던 그들도 나이가 들면서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부르는 트로트를 들은 기억을 재생하여 이 노래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젊은이들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촌스러운 어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트로트가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걸어왔던 선조들의 삶에 위안을 제공하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또한 이렇게 민족의 애환을 녹여왔던 트로트를 부르면서 그들 스스로도 기쁨을 배가하고 슬픔을 반감시키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트로트는 일본 엔카(演歌) 기원설 등 여러 가지 시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살아온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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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경남 남해 출생. 영남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 하와이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문화부 제1차관, 예술의전당 사장, 제19대 국회의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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