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야, 아무개야. 넌 선배와 꼰대의 차이를 아나뇨?”

“아니요. 모르는데요.”

“선배는 말이야, 후배가 물어볼 때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이고, 꼰대는 물어보지 않은 거까지 시시콜콜 설명하는 사람이란다. 알았니?”

“안 물어봤는데요?”

웃기는 꼰대문답이다. 꼰대는 노인,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이자 비칭이지만 나이를 떠나 사고방식이 권위주의적인 이들을 비하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주름이 많다’는 의미에서 '번데기'의 경상도, 전라도 방언인 꼰데기나 꼰디기에서 나왔다거나 나이 든 세대의 상징인 곰방대가 줄어든 말이라는 설도 있나 보다.

일본어엔 ‘로가이(老害)’라는 게 있는데, ‘고가이(公害)’에서 유래한 말이라니 어느 나라나 늙고 나이든 사람은 말이 많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다. 영어로는 has-been(한물간 사람), fogey(고루한 사람) 정도로 번역되며 꼰대질 행위는 'bossy(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정도의 형용사로 표현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타인을 무례하게 하대하는 노년층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마땅치 않아 ‘꼰대(kkondae)’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꼰대’는 해외에도 꽤 알려진 한국어 단어다. 영문 위키백과에도 설명 문서가 존재한다. 2019년 9월 24일에는 BBC2 공식 페이스북이 이 단어를 소개했다. 꼰대는 있으나 꼰대를 표현하는 적당한 말이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좋은 단어를 알려준 셈이다.

‘재벌’, ‘갑질’도 이미 해외에 잘 알려진 우리말이다. 그 이전에 국제화 세계화를 이룬 우리말로는 김치, 온돌, 불고기, 빨리빨리, 소주 이런 것들을 들 수 있다. 라면도 잘 알려진 말이긴 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일본어 라멘이 더 친숙한 것 같다.

LH 직원들의 토지 투기를 '내로남불'에 빗대어 비판하는 말 'LH로남불'.
LH 직원들의 토지 투기를 '내로남불'에 빗대어 비판하는 말 'LH로남불'.

이런 말들에 비하면 ‘내로남불’은 확실한 세계어로 공인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4월 10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한 4·7 재보선 결과를 보도하면서 그 이유로 ‘naeronambul’을 꼽았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If I do it, it’s a romance. If you do it, it’s an adultery(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라는 설명을 붙였다. 우리말이 거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내로남불을 발음 그대로 소개한 게 왜 ‘역사적 쾌거’인가. 그 이전 한글의 세계화는 우리 고유어나 한자어가 세계인이 사용하는 세계어로 공인된 경우에 불과하다. 내로남불은 격이 다르다. 내로남불의 ‘내’는 나, 그러니까 한글 고유어이고, ‘로’는 영어와 프랑스어의 romance, 독일어의 Romanze, 일본어 ロマンス(로만수)의 앞글자이며, ‘남’은 한글 고유어, ‘불’은 한자 ‘不’의 우리 발음이다. 한 단어에 세계의 주요 언어를 유기적으로 통합해 절묘한 시너지효과를 내고 사자성어라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 우리말 창제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내로남불’은 모두가 함께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쳐 다듬어온 말이다. 특히 정치권이 합심 협력해 언중(言衆)의 지지와 동참을 적극 유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말을 처음 쓴 정치인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4·11총선(제15대) 직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신한국당)이 야당 의원들을 영입하자 제1 야당(새정치국민회의)이 맹공격했다. 박 의원은 “1995년 국민회의가 (분당 과정에서) 민주당에서 의원을 빼간 것부터 따져보자”며 “내가 바람피우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가”라고 받아넘겼다.

이후 계속 애용돼온 내로남불이 문재인 정부만큼 많이 쓰인 적은 없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과거의 말과 글이 예외 없이 본인과 정권을 향한 부메랑으로 돌아와 ‘조로남불’, ‘조적조(조국의 적은 조국)’라는 말까지 생겼다. 2019년 국감에서 야당 의원이 “내로남불도 유분수”라고 지적하자 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내가 조국이냐”고 대든 일도 있다.

이번 재보선에서 선관위는 국민의힘이 ‘투표가 내로남불을 이깁니다’라는 문구를 펼침막 등에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자 “특정 정당(후보자)을 쉽게 유추할 수 있거나 반대하는 표현이라서 사용할 수 없다”고 불허했다. 그러자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내로남불 정당이라는 사실을 국가 기관이 공식 인정했다”며 오히려 좋아했다.

당 대표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의원은 "당 대표가 된다면 민주당은 더 이상 내로남불이 없을 거라고 분명히 약속한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20일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국민들 보기에 저 사람은 투기꾼이라 한다면 당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10명이든 20명이든 출당이라는 과감한 조처를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런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 내로남불은 ‘착용감’과 ‘가성비’,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말이다. 이런 말을 자꾸 더 개발해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언제까지 갑질 꼰대 재벌 내로남불…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세계화시킬 것인가.

구두를 고치는 '수선'도 세계화를 지향하는 걸까. 굳이 영어로 써놓은 곳이 있다.[임철순 찍음] 
구두를 고치는 '수선'도 세계화를 지향하는 걸까. 굳이 영어로 써놓은 곳이 있다.[임철순 찍음]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나는 '넉넉하다'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나도 너그럽다와 함께 이 말을 좋아한다. 앞으로 세계화하기를 바라는 우리말은 고수련(앓는 사람의 시중을 들어줌), 그루터기, 너나들이, 단비, 디딤돌, 울력, 윤슬, 이웃, 이바지, 이렇게 긍정적이고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뜻이 담긴 것들이다. 이런 말은 수도 없이 많은데 더 예를 들지 못하겠다. ’다원‘도 좋다. ’모두 다 원하는 사람, 모두 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우리말이다.

 아카데미영화상 다부문 수상이 유력한 '미나리'.
 아카데미영화상 다부문 수상이 유력한 '미나리'.

25일(일)에 열리는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6개 부문 후보로 올라간 영화의 제목 ’미나리‘도 참 좋다. 작년에 이 상을 받은 ’기생충‘이나 그 영화에 나오는 ’짜파구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감과 음감이 좋고, 미나리의 상징성이 긍정적이고 국제적이다.

내로남불의 성공은 사실 성공이 아니며 쾌거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 아니, 이 경우는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인들이 언행을 더 닦고 다듬어야 우리말이 빛나고 쓰임새 좋은 세계의 언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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