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시인·영문학자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7~1961)는 ‘명정(酩酊) 40년’의 저자로 유명한 술꾼이었다. “내 지난날 설중생매(雪中生埋, 산 채로 눈 속에 묻힘) 몇 번이고, 오투타가(誤投他家,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감) 몇 번이고, 취와노상(醉臥路上, 술 취해 길에서 잠듦) 그 얼마던가!” 위 문장처럼 한평생 술 마시고 벌인 추태와 실수가 흥건·질펀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재미있고 유쾌한 명저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변영로 등 술꾼 4명이 발가벗고 소를 탔던 에피소드를 다룬 그림(‘신천지’ 1941년 11월호).
변영로 등 술꾼 4명이 발가벗고 소를 탔던 에피소드를 다룬 그림(‘신천지’ 1941년 11월호).

그 책에서 읽은 건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주가 어느 날 길을 걷는데 누군가 “변정상 씨, 변정상 씨” 하고 아버지 이름을 불러 돌아보니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이었다. 왜 아버지 이름을 부르시느냐고 볼멘소리를 하자 월남은 “아니, 그러면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한다. 월남은 종자[種]를 말한 건데, 수주는 호칭[氏]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씨(氏)는 ‘같은 성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풀이돼 있다.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렵고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을 부를 때 쓴다. 그래서 ‘씨’ 대신 직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부를 때 ‘아무개 씨’가 아니라 ‘아무개 님’이라고 한다.

높으신 분이나 윗사람을 ‘씨’라고 부르면 사달이 난다. 대통령의 경우 도올 김용옥의 ‘노무현 씨’, 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박근혜 씨', 개그맨 이용진의 ‘문재인 씨’ 호칭이 말썽이 된 적 있다. 한 신문이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썼다가 ‘여사’라고 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았다. ‘씨’와 ‘여사’ 모두 높임말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17년 5월 청와대 관저로 떠나며 동네 주민과 인사하고 있다. 이때 ‘김정숙 씨’라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빚어졌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17년 5월 청와대 관저로 떠나며 동네 주민과 인사하고 있다. 이때 ‘김정숙 씨’라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빚어졌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는 지난해 청와대가 자신을 ‘전광훈 씨’라고 부르자 ‘모욕’을 준 것이라고 반발했다. 내가 아는 신문사 선배는 퇴직 후 무슨 서류인가를 발급받으러 가 대기 중일 때 새파랗게 젊은 여직원이 “아무개 씨!” 하고 부르더라며 분개했다. 그 말을 열 번은 했다(커피 대접하며 정중하게 모셔도 시원찮을 판에!).

‘씨’든 ‘님’이든 좋지만 아무 존칭이나 호칭도 없이 사람을 부르면 싸움이 나기 쉽다. 어느 퀵 서비스 노동자는 “제 이름은 ‘어이, 오토바이’가 아닙니다”라는 글을 썼다. 경찰관들은 그를 “어이, 오토바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교통단속에 걸렸을 때 “오토바이!”라고 불러 세운 경찰관이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말도 없이 오토바이 키를 빼 간 경우도 있다. 그는 “세상은 저를 일반 노동자로 보지 않습니다. 아니,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도 힘이 듭니다”라고 호소했다.

퀵 서비스 노동자들이 인간 대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퀵 서비스 노동자들이 인간 대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어이!”는 국회에서도 문제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도중 정의당 류호정 의원을 홈쇼핑 대표가 “어이!” 하고 불렀다는 게 시비의 초점이었다. 류 의원이 나이가 어려 반말하며 무시했다는 논란이 커지자, 그는 “감탄사와 같은 혼잣말 표현”이라고 군색하게 해명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가장 큰 불만도 비슷하다. 2년 전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알바생 95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고객의 매너없는 행동으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90.2%였다. 상처를 준 경험 중 가장 많은 게 고객들의 반말이었다.

조선 후기의 평민화가 최북(崔北, 1720~?)은 호가 기암(箕庵), 성재(星齋)였지만 양반들이 자꾸 이름 대신 “어이, 거기!” 하고 부르자 화가 나서 아예 거기재(居其齋)라는 호를 더 지었다. 최북은 어떤 부자가 그림을 요청했다가 얻지 못해 협박하려 하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날 손대야겠다”며 스스로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 버린 사람이다. 그런 성격이니 모욕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씨’는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 쓰기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씨’는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3인칭 대명사로, 앞에서 성명을 이미 밝힌 경우에 쓸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적 사무적인 자리, 독자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언론보도에서는 얼마든지 써도 된다. 그런데 기사를 읽다 보면 기자들의 ‘호칭 스트레스’가 매우 큰 것 같다. 2020년 1월 13일자 모 신문의 기사문장을 보자.

소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유해용(53·연수원 19기)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승태 사법부 의혹에 대한 법원의 첫 형사재판 결과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8부(박남천 부장판사)는 13일 오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유 전 연구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 전 연구관이 문건 작성을 지시해서 임 전 차장에게 전달했다거나, 임 전 차장이 사법부 외부 인사에게 제공했다는 것과 관련해 두 사람이 공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중략) 퇴직 후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등을 유출한 혐의에 대해서도 (중략) “설령 유 전 연구관이 해당 파일을 변호사 사무실에 보관한 것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이 재판 내내 항의한 피의사실 공표 등 검찰의 위법 수사와 관련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검찰과 유 전 연구관의 비공식 면담 과정에서 (검찰이) 유 전 연구관에 대해 사실상 피의자로 보고 혐의 사실을 조사했다거나, 이를 전제로 한 수사 과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전직이지만 호칭을 맨 앞에 썼으면 그다음부터는 유씨라고 쓰면 그만일 텐데 모든 신문과 방송이 그야말로 악착같이 끝까지 ‘유 전 연구관’이라고 보도했다. 기자들이 이렇게 쓰는 이유는 ‘씨’라고 하면 그를 공손하지 않게 하대하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기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보도하면 그만이다. 취재 중인 기자는 나이가 적더라도 취재원이나 보도 대상자의 후배나 아랫사람이 아니라 한 매체의 대표다. 분명한 직함이 있는 현직 인사라면 그 호칭을 존중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씨’로 충분하다. 그렇게 해야 읽거나 듣기에 편하고, 글자 수도 많이 절약된다. '씨'라고 쓰는 건 불경죄가 아니다. 

4월 7일은 이미 다 지나갔지만, 제65회 ‘신문의 날’이라 늙고 낡은 기자로서 보도와 호칭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씨’는 격한 감정을 나타내는 감탄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아는 욕의 준말이다. 설마 이 글을 읽고 “이런 씨” 그러는 기자들은 없겠지? 그런 씨 말고 호칭 ‘씨’를 잘 활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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