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SR 임철순 주필] 

“아아, 잘 들리십니까? 전 표정화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떡도 맛있으면 맛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드십시오.”

지난 19일 아침, 구례 산수유와 광양 매화를 찾아가는 남도행 관광버스는 만원이었다. 50대 여성 가이드는 시루떡을 나눠주고는 이렇게 안내를 시작했다.

표정화? 이름도 참 특이하구나. 마스크 속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나라면 “제 표정이 화난 거 같지요? 아니걸랑요.”라고 말을 시작했을 거 같다. 난 왜 이렇게 남의 이름에 신경을 쓰나? 몇 년 전 해외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 아가씨가 ‘손설경’이라고 하기에 “손님 여러분, 설명 잘 들으세요, 경치만 보지 말고” 이렇게 말해주었더니 자기 이름이 완전 가이드용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3월 4일 ‘미스트롯2’의 최종회에서 김성주 아나운서가 양지은 홍지윤 중 누가 진인지 발표를 하지 않고 시간을 끌 때, 나라면 이렇게 진행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스트롯2 진의 성에는 똥글뱅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은 이름이 ‘지’로 시작됩니다”, “한 가지 더! 진의 이름은 ㅈㅇ입니다”, 요렇게 애를 태우면 더 재미있었겠지? ㅋㅋ

산수유가 만발한 전남 구례. [임철순 찍음]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없다.”더라.

구례는 산수유의 노랑세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산동 상위마을은 주민들이 환영하지 않아 가지 못하고, 일부러 조성한 산수유사랑공원에서 꽃구경을 했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의 하이쿠처럼 초면인 사람들끼리도 꽃 앞에서는 좀 친해지는 것 같았다.

관광객들 중에는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셋 있었다. 그들이 노란 산수유 사이로 거니는 모습을 먼발치로 보면서 당 시인 유희이(劉希夷, 652~680)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을 생각했다. “이 노인의 흰 머리 참으로 가련하지만/그도 지난날엔 홍안 미소년이었다네.”[此翁白頭眞可憐 伊昔紅顔美少年]

세 사람은 어떤 친구간일까. 점심 식사 때 밥보다는 소주를 거의 한 병씩 마시면서 대화를 하던 그들은 버스에서 오르내릴 때도 그리 굼뜨지 않았다. 앞뒤로 죽 앉은 자리 탓도 있지만, 차내에서도 내내 조용했다. 그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봄을 맞을 것인지, 내 경우는 어떨지를 아주 잠깐 생각했다.

“오시지 마시지 마시지 마시지 마시지요.”
산에 하얗게 보이는 것은 거의 다 벚꽃이다.

광양의 매화는 거의 다 지고, 매화 사촌이라는 벚꽃이 만발해가고 있었다. “​섬진강에 가서/​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섣불리/​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정호승의 시 ‘낙화’ 끝부분)던가. 그러나 나는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 중 “니화(梨花)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를 “매화는 벌써 지고, 벚꽃이 흐드러질 때”로 바꾸어 혼자 뇌었을 뿐 그 뒤를 이을 말은 지어내지 못했다.

벚꽃 사이 매천 황현의 시가 새겨진 바위.

매화축제는 취소되고 주민들은 방문을 자제하라는 펼침막을 내걸었지만, 꽃 앞에서 사진을 찍고 매화 아이스크림, 매화 막걸리를 먹고 마시는 관광객 중 그걸 의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화를 밀어내고 피어난 벚꽃 사이사이 큰 바위에는 매화 시를 썼거나 이름이나 아호에 매화가 들어 있는 문인들의 작품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절명시를 보면서 ‘글 읽는 사람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를 되새겼다.

우리 가이드는 서울에서 출발할 때 “어디 벚꽃이 제일 예쁜지 아세요?”라고 물었다(자기가 먼저 말을 하지 말라 해놓고 묻긴 왜 물어?). 매화 보기는 이미 어렵고 벚꽃도 아직 시원찮을 거라서 김을 빼려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그녀의 자문자답은 그럴듯했다. 꽃은 우리 동네, 내 집 앞에 핀 꽃이 가장 예쁘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 말은 맞다. 벨기에의 노벨상 수상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의 동화극 ‘파랑새’에서 틸틸과 미틸(일어 번역판으로는 찌루찌루와 미찌루)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다니다가 집에 있는 새장 속의 산비둘기가 바로 파랑새라는 걸 알게 된다. 송 시인 대익(戴益)의 ‘탐춘(探春)’에는 종일 봄을 찾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봄이 벌써 가지 끝에 이르렀더라’[春在枝頭已十分]는 말이 나온다.

맞다. 그 말은 맞다.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다.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더라는 깨달음을 글에 쓴 사람이 있다. 괴테처럼 이탈리아를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다. 멀리 가서 보고 온 꽃은 바로 내 집 앞에 피어 있는 그 꽃이다.

두보(杜甫, 712~770)의 ‘月夜憶舍弟(월야억사제)’는 달 밝은 밤에 고향과 아우들을 그리워하는 시다. 여기 나오는 ‘月是故鄉明(월시고향명)’은 “달은 고향의 달처럼 밝으리”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나는 “달도 고향 달이 더 밝고”로 새기고 싶다. “달도 고향 달이 더 밝고 물도 고향 물이 더 달다”[月是故鄉明 水是故鄕甛], 이런 시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어딘가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걸까?). 우리 ‘고향설’이라는 대중가요도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일세”라고 하지 않던가?

구례와 광양을 다녀온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모든 꽃이 서둘러 북상 중이다. 이미 우리 집 앞에서는 개나리가 눈부시게 노랗고, 목련이 눈시리게 하얗고, 할미꽃이 고개가 구부러진 채 까치발을 들고, 얼어죽은 것 같던 동백이 눈 뜨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봄이 막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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