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미디어SR 한혜리 기자] 

"슬릭은 알고 보니 누구랑 붙여놔도 잘하는 친구였던 거죠."

에일리와 합동 무대를 끝낸 슬릭에게 치타가 남긴 말이다. 엠넷의 음악 프로그램 '굿 걸(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은 그야말로 래퍼 슬릭(SLEEQ)의 재발견이었다. 누구와도 어울리기 쉽지 않았던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만능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줬으니까 말이다. 이제 슬릭의 이름 앞에는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게 됐다. 알고 보니 '다재다능 능력자' 아티스트 슬릭. 뜨거웠던 '굿 걸'이 종영한 뒤 새로운 수식어로, 혹은 더욱 길어진 수식어로 바빠진 슬릭을 만나 '굿 걸'의 못다 한 이야기와 그의 신념,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Q. ‘굿 걸’이 끝난 후의 일상은 어떤지 궁금해요.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을까요?
슬릭:
많이 바빠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행사나 공연은 거의 없어요. 주로 화보나 인터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얼마 전엔 영화 ‘밤쉘’ GV에 참여했는데, 이게 거의 ‘굿 걸’ 끝난 후 팬들을 처음 만나는 장소였어요.

Q. 슬릭의 ‘굿 걸’ 출연은 정말 의외였어요. 출연 계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방송에서는 “경쟁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연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슬릭:
처음 피디님이 섭외 전화를 주셨을 때, ‘굿 걸’은 경쟁 프로그램이 아니라 여성 아티스트들이 팀을 이뤄서 노래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그때가 아마 작년 말에서 올해 초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거예요. 당시 저는 3집을 준비하다가 엎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장 아쉬웠던 게 피드백을 받을 동료가 부족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섭외가 들어왔을 때, “어? 동료 아티스트가 생길 좋은 기회겠구나” 했었죠. 이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예요. 다른 색깔의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출연한다는 자체가 좋았거든요.

Q. ‘굿 걸’은 슬릭의 “몰라봤습니다!”가 거의 유행어처럼 될 정도로 많은 시청자가 즐겨본 프로그램이 됐어요. 오히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슬릭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어요.
슬릭:
사실 시기적으로 그럴 수 없는 게, 최근에는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모두가 마스크를 쓴 상태여서 “어? 슬릭인가?” 의심은 하시지만 말을 걸거나 알아보시진 않는 것 같아요. 최근 GV에서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그때 TV의 힘을 느낀 것 같아요. (웃음)

Q. 첫 무대이자 크루 탐색전 선곡으로 자전적인 가사의 내용이 담긴 ‘히어 아이 고(Here I go)’를 선택했어요. 그때 무대를 마치고 현장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슬릭:
그땐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무대를 촬영한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생소한 일이었거든요. 무대도, 음향도 모든 게 다 새로웠어요. 그래서 현장에선 더더욱 반응을 살필 여력이 없었어요. 또, 아침 일찍부터 리허설을 하고, 촬영하느라 바빴거든요. 저도 방송이 나가고 나서야 ‘반응이 저랬었구나’ 하고 알았어요.

Q. 방송 후 반응들은 어땠나요.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나요?
슬릭:
이렇게 크게 반응해주실지 생각도 못 했어요. 첫 방송 끝나고 작가님께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제 이름을 캡처해서 보내주시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 보면, 첫 무대를 인상 깊게 보셨다는 분들이 많으세요. 충격적이었다는 말씀도요. ‘첫 무대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싶더라고요. 하하.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어요.

Q.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서’가 아니었을까요? 아무래도 맨발로 무대를 소화해낸 힙합 아티스트는 거의 전무후무하니까요.
슬릭:
맨발은 사실 처음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어요. (웃음) 촬영 전날에 무대에 어울리는 의상을 고르는데, 신발을 뭘 신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구두를 신어야 어울릴지, 운동화를 신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요. 결국 촬영 날 반짝거리는 화려한 구두를 가져가긴 했지만, 이걸 신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문득 ‘맨발로 해볼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리허설 때 신발을 신고도 무대를 해보고, 안 신고도 무대를 해봤어요. 맨발의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벗고 하기로 결정한 거죠.

Q. 맨발이었으면 무대 울림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겠네요.
슬릭:
맞아요. 생각해보면 평소에 우린 맨발로 다른 사람들 앞에 서 있을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새롭긴 했어요. 발바닥이 차갑기도 하고요. 하하. 신발 하나 벗었을 뿐인데 모두 헐벗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새로운 느낌이더라고요.

Q. ‘굿 걸’을 통해서 아홉 명의 다양한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을 한 셈이었어요. 함께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아티스트는 누구인가요?
슬릭:
정말 모두가 매력적인 아티스트였어요. 그전까지 저는 ‘협업’이란 형태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혼자 작업했고, 그게 익숙했죠. 그전까진 ‘음악적 동료’를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굿 걸’을 통해 만난 아티스트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그들은 확실히 대중에게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더라고요.

또 그걸 프로페셔널하게 해내고요. 저 같은 경우는 대중음악이라기보단 장르 음악에 가깝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주로 제가 표현하는 것에 포커스를 둔 작업들이었죠. 그래서 많은 걸 배웠어요. 예를 들자면 효연 언니한테서는 무대에서 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혹은 퍼포먼스 같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죠.

Q. 컬래버레이션 무대를 통해 아티스트 모두 새로운 도전에 임하며, 즐거워하는 게 엿보였어요. 슬릭에게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나 무대는 언제였나요?
슬릭:
많은 순간이 즐거웠지만, 첫 무대나 두 번째 무대는 긴장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적응된 세 번째 무대에서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와 두 번째 무대에서는 많이 긴장한 탓에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만 했어요. 리허설을 보고 반성하고, 본방송을 기약하는 걸 반복했죠. 하지만 퀸 와사비와 함께한 마지막 무대에서는 좀 더 편하게 임했던 것 같아요. 처음 댄서들과 함께한 무대였지만, 그만큼 연습도 많이 하고 합이 잘 맞았거든요. 매일 만나서 아이디어도 편하게 주고받았고요. 아마도 (퀸) 와사비 역시 저와 같이 슬슬 방송 무대에 적응했던 것 같아요.

Q. 그럼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아요. 이제서야 방송과 무대를 좀 알게 됐는데 말이에요.
슬릭:
맞아요. 저도 그렇고 ‘굿 걸’ 멤버들 모두가 많이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더 다양하고 새로운 조합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요. 10명이니까요. 다들 적응할만하니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Q. 다른 팀 무대 중에 탐이 났던 무대 콘셉트는요?
슬릭:
‘굿 걸’ 무대들이 모두 각양각색으로 매력 있었잖아요. 아홉 명의 아티스트들은 모두 멋지고 제가 못하는 걸 해내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윤훼이랑 영지가 함께 했던 ‘댓츠마걸 !!!’이라는 무대를 가장 흥미롭게 봤었어요. 비트가 변주되고 두 사람이 핑퐁처럼 호흡을 주고받는 무대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물론 윤훼이랑 영지였기 때문에 완성된 무대였지만요.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Q.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잖아요. 누군가는 비주얼, 혹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선율로 메시지를 표현하기도 하고요. 평소 페미니즘이나 자신의 철학을 담은 가사 때문인지, 슬릭의 음악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가사라고 느껴져요. 음악을 만들 때 주로 어떻게 작업이 이뤄지는지 궁금해요.
슬릭:
이 질문은 제가 늘 하는 고민이에요. 저의 작업방식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어요. 좋게 말하자면, 정형화된 패턴 없이 자유롭게 가능성을 열어두는 편이에요. 어디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게요. 예를 들어 ‘이번 노래는 이런 느낌이니까, 가사를 이렇게 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노래든 ‘어떻게 쓸까’라는 고민이 중점인 편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뭐든 다 해봐요. 책과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른 음악을 듣기도 하고요. 물론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이런 방식의 단점은 체계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Q. 체계적이지 않지만, 슬릭의 가사는 굉장히 잘 정리된 글 같아요. 이처럼 산문적인 긴 랩을 구사하는 걸로도 유명하잖아요. 방송에서도 그런 장점들이 돋보였고요. 가사를 쓸 때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쭉 써 내려가는 스타일인가요?
슬릭:
전혀 아니에요. 하하. 가사를 길게 쓰는 건 버릇이나 습관 같은 건 아니고, 제가 선택한 방식이에요. 제가 음악을 만들 때 8할 정도는 리듬을 먼저 생각해요. 그 후에 가사를 덧붙이죠. 완성된 형태나 내용을 먼저 생각하고 한 번에 가사를 쓰진 않아요. ‘가사’ 역시 글이기도 하니까 정돈된 문장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게 좋은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볼 땐 좋더라고요. 그래서 가사가 길어지는 것 같기도 해요.

Q. 슬릭을 말할 때, 페미니즘이나 비거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도 없겠죠.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선언한 아티스트이기도 해요. 신념은 지켜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신념들이 혹여나 흔들릴 때도 있었는지 궁금해요.
슬릭:
사실 제 내면에서 생각해왔던 신념이 흔들리거나, 옳지 않다고 여겨질 땐 없었어요. 그렇지만 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잖아요. 세상과 소통을 하거나 상호작용을 하면서 반대의 신념과 부딪힐 때마다 종종 흔들림을 느끼기도 해요. 사람이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들은 아직 문화적으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기도 했고요.

Q. 슬릭이 흔들리는 순간은 사회적 타협과 부딪히는 순간들인가요?
슬릭:
아니요. 차라리 타협은 괜찮아요. 저는 이미 제 신념을 음악으로 세상에 공표해놓은 상태니까요. 하하. 제가 제일 힘들 땐 ‘고립된다’는 감정인 것 같아요. ‘나는 특이한 사람이고, 이상하고, 뭔가 다른 사람이다’라고 느껴질 때요. 사실 거대한 흐름을 빗겨나간다는 건 무서운 감정이 들 수 있잖아요. 저 역시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니까요. 지금 한국의 사회는 ‘이 사람이 페미니즘을 지지해서, 비건이라서’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아서 눈치를 주는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고립되거나 부정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죠.

Q.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크게 공감되는 말이네요. 그런 고립된 느낌은 늘 어렵게 느껴지고 두렵기도 하죠. 슬릭은 이럴 때마다 어떻게 이겨내려고 하나요?
슬릭:
극복 자체는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구조하고 싸우는 개인이잖아요. 상대방이 너무나도 거대하죠. 하하.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정신을 분산시키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두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등 집중을 분산시키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지나기를 기다려요. 지금에 있어서는 최선의 방법이에요.

Q. 때로는 페미니즘이라는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진 않나요?
슬릭:
페미니즘을 학문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려운 얘기들이 가득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학문을 다룬다기보단 페미니즘을 통해 그저 단순한 걸 필요로 할 뿐이에요. 제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은 절대 어렵진 않거든요. 비록 미움을 받을지언정.

Q.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이 생각하기에,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떤 시기를 지나는 것 같나요?
슬릭:
‘도미니언(Dominion)’이라는 비거니즘에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동물들이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굉장히 적나라한 내용의 작품이에요. 보고 있으면 괴롭지만, 그래도 계속 봐야 하는 내용이죠. 거기서 사람들은 진실을 받아들일 때 3단계를 거친대요. 첫 번째는 조롱하기, 두 번째는 폭력적으로 부정하기, 세 번째로는 받아들임. 지금이 딱 그 첫 번째를 지나는 것 같아요. 물론 0단계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로 무지요. 지금이야 대충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고, 저걸 조롱해보자는 단계까지 왔지만, 모르던 시기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페미니즘을 공부했을 때만 해도 그랬거든요. 그땐 “페미니즘이 뭐지?” 했는데, 지금은 “헐, 페미니즘”이라고 반응하잖아요. 페미니즘에 대해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건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라는 단순한 명제일 뿐인데 말이에요.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Q. 슬릭의 음악적 신념도 궁금해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게요. 슬릭이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슬릭:
사실 거창하진 않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창작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적엔 내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었어요. 필요해서 하는 일이 아닌 데도 해내는 일이니까요. 이런 생각들이 모여 창작자를 만드는 것 같아요. 그때부터 창작에 대한 동경을 어떻게 현실화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방법으로 글과 음악을 찾았죠. 그래서 지금의 제가 된 거예요.

Q. 슬릭은 자신의 철학을 따라, 음악을 따라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어요. 재즈적 요소가 가미된 두 번째 앨범 ‘LIFE MINUS F IS LIE’도 그렇고 음악의 장르적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적용했잖아요. 요즘 관심이 가는 장르가 있다면요?
슬릭:
요즘엔 2000년대 초반 R&B에 꽂혀 있는 것 같아요. TLC, 에즈원, 제이, 박지윤, 플라이 투더 스카이 같은 아티스트들의 음악이요. 지금 다시 들어보면 소리가 굉장히 따뜻하면서도 작아요. 음악은 시간에 따라 볼륨이 계속 커져 왔잖아요. 소리가 크고 짱짱해야지 좋은 음악이라고 느껴지죠. 그래서 온갖 기술을 총동원하여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요. 저는 케이팝(K-POP)이 그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크고, 화려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고요. 이렇게 작은 소리 하나까지 완벽히 채워져 있는 요즘의 음악을 듣다가, 2000년대 초반의 음악을 들으니 약간 비어있는 느낌도 나면서 그때만의 정서가 느껴지더라고요.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 이해하게 되는 정서들도 있고요.

Q. 앞서 말했던 것처럼 슬릭은 케이팝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굿 걸’ 출연자들도 “몰라봤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실 노래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슬릭이 생각하는 케이팝의 매력은 무엇일까 궁금해요.
슬릭:
케이팝 짱이죠! 하하. 케이팝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완성도인 것 같아요. 케이팝을 만드는 사람들은 완성도 백 퍼센트를 충족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늘 완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주얼이든, 사운드든 모든 방면에서요. 어떻게 보면 타겟팅을 잘 잡은 거죠.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여 완성시킨다!’ 이런 느낌으로요. 누가 더 완성도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가. 얼마나 더 취향 저격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케이팝 산업의 핵심인 것 같아요.

Q. 요즘 들었던 케이팝 중에 높은 완성도를 느낀 곡이 있다면요?
슬릭:
같이 사는 룸메이트 친구가 케이팝 댄스 강사예요. 그래서 집에서 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케이팝을 들어요. 하하. 시간이 좀 지났지만, 아이즈원의 '피에스타(FIESTA)'를 꼽고 싶어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명받아요. 정말 완성도가 높고 힘을 줬다고 느껴졌거든요. 이렇게 좋아하면서도 아이즈원 분들이 앞에 계시면 또 못 알아보겠죠?(웃음) 케이팝은 크루가 만들잖아요. 씬에서 가장 ‘핫’한 탑 라이너가 만들고, 많은 편곡자가 함께하고, 최고의 믹스 마스터링까지 거치고 나면, 2만 원짜리 스피커로 들어도 ‘짱짱’한 노래가 되는 거죠.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 이런 노력이 귀로 들리는 게 참 신기한 일이에요.

Q. 그렇다면 자신의 장르인 힙합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슬릭:
리듬이지 않을까요? 힙합은 리듬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래서 여러 장르에서, 혹은 케이팝 안에서도 힙합의 리듬을 차용하잖아요. 몇십 년이 지나도 그 리듬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 준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에요. 그리고 작법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죠.

Q. 슬릭이 힙합을 선택한 이유도 작법과 리듬 때문일까요?
슬릭:
힙합을 택한 건 정말 어릴 적이었어요. 그때의 저는 작사에 끌렸던 것 같아요. 라임을 만들고 랩 가사를 쓰는 것에 매력을 느꼈죠. 정확히 말하자면 힙합이라기보단 랩에 꽂혔어요. 오히려 힙합의 음악적 매력을 느낀 건 성인이 되고 난 뒤인 것 같아요. 그때부터 ‘힙합’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Q. ‘히어 아이 고’ 가사에서 "고민하지 어떤 게 예술가의 삶"이라고 말하잖아요. 슬릭의 입장에 빗대어 본다면, 래퍼의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슬릭:
음, 글쎄요. 다른 래퍼들이 어떻게 사는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래퍼는 말로 기록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가사는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보다는 말로 뱉어내야지 존재감이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리되어 기록된 말을 계속 고민하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래퍼 슬릭(SLEEQ). 사진. 구혜정 기자

Q. 다시 돌아가 이야기해보자면, ‘굿 걸’은 제목부터 사전적이거나 통속적인 의미를 벗어난다는 아이러니함이 담겨있었잖아요. 슬릭이 생각하는 ‘굿 걸’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슬릭: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안에서 ‘페미니즘’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방하는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굿 걸’ 10명 모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으로써 각자 어떠한 ‘틀’에 갇혀있었다고 생각해요. 쉽게 말하자면 오해나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틀을 깨는 건 보다 더 큰 챌린지일 거예요. 왜냐하면 보여지는 게 삶인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모두 자신의 틀을 깨려고 노력하고 도전했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10명은 내내 함께였고요. 가지각색의 10명이 잘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서로를 틀에 가두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에 있어요. 내 안에서 다른 9명의 이미지를 상쇄하려고 지속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대했죠. ‘굿 걸’은 모두 위치는 다르지만, 연예계 안에서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표들을 한 번씩은 재정립할 수 있는 도전이지 않았나 싶어요.

Q. 그래서인지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반응을 보였어요. 요즘 말로 ‘과몰입’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출연자인 슬릭이 봤을 때, ‘굿 걸’이 사랑받은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요?
슬릭:
저도 반응을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굿 걸’이 재밌다고 한 시청자들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는 듯해 보였어요. 재미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이입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죠. 심지어 MC인 딘딘 씨한테도요. 엠넷이 만든 다른 경쟁 프로그램들은 출연자들을 관조하는 재미로 봤을 거예요. 출연자의 자극적인 반응에 초점을 맞춘 재미였다면, ‘굿 걸’은 그런 재미보단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내가 저 무대를 앞에서 봤다면’이라고 이입하면서 출연자들을 애정 있게 봐주신 느낌이에요. 우리라는 열 명, 혹은 열 명의 관계성을 사랑해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Q. 또 다른 공감의 방식이네요.
슬릭: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찾아보니 그런 반응들이 많았어요. 열 명이 방송 끝나고도, 방송 밖에서도 잘 지내는 게 좋다는 반응들이요. 기존의 경연, 경쟁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관계들이잖아요. ‘굿 걸’을 하면서도 우리의 모습을 더 보여줄 수 있는 리얼리티가 있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했어요.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무대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하더라고요. 하하. ‘굿 걸’들과는 방송 끝나고 더 끈끈해진 느낌이에요.

Q. ‘굿 걸’이 슬릭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요?
슬릭:
최근에 이걸 많이 고민했어요. 마지막 촬영한 지 한 달 정도(인터뷰 날짜 기준)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굿 걸’로 인해 제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받은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눈에 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게 사실 제 적성에 맞지는 않거든요. 저는 딱히 눈 밖에 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엄청 활발한 사람도 아니에요. 소극적이고 물 흐르듯이 사는 사람인데, 계속 ‘외인’으로 존재하면서 알게 모르게 저 스스로 ‘날 좋게 생각해주지 않을 거야’, ‘내가 뭘 해도 별로라고 생각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협업을 요청해도 거절당할 것 같았고요. ‘굿 걸’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깨준 계기가 됐어요. 감사하게도 무대와 방송을 통해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내가 이렇게 도전해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이 바뀌었죠. 이런 점이 좋으면서도 걱정스러운 건 어쨌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게 됐다는 거잖아요. 내가 ‘외인’으로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내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살까 싶었는데, 이러한 생각에 차질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요. 하하.

Q. 어떻게보면 슬릭 안에 있던 선입견이 깨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겠네요.
슬릭:
그렇죠. 이젠 저 스스로를 좀 더 믿어도 된다는 공증을 받은 느낌이에요.

Q. ‘굿 걸’에 출연 이후 앨범이 궁금해져요. 새로운 경험을 맛봤으니, 새로운 이야기가 더 담기지 않을까 싶네요.
슬릭:
이 경험들이 노래가 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직 제 안에서 언어로 정리되진 않았거든요. 지금은 가볍게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노래를 만드는 저도, 듣는 사람도 편하고 즐거울 수 있게 말이에요. 저도 그런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Q. '즐겁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굿 걸'을 볼 때 함께하는 ‘굿 걸’들도 그렇고, 슬릭의 표정은 참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요. ‘굿 걸’이 종영한 뒤, 지금의 슬릭은 즐거운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슬릭:
글쎄요. 즐거울 때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오히려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요. 분명한 건‘굿 걸’ 촬영한 순간, 혹은 ‘굿 걸’들을 통해 제가 행복한 사람이 된 건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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