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미디어SR 김예슬 기자] 최근 충무로를 관통하는 주요 화제 중 하나는 여성 캐릭터의 서사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나타난 변화인데, 여성들의 부당한 처지를 조명하는 이야기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지는 것은 반색할 만한 일이다.

남성 영화가 주류로 군림하고 있는 작금의 영화 시장에서, 야구에 소질을 가진 어린 여성이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야구소녀’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손님이다.

그 동안 미디어에서 수없이 재현됐던 ‘남성이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성별만 바꿔 여성의 성공 이야기로 치환했을 때, ‘클리셰’라고 불릴 정도로 흔한 주류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비주류 정서로 탈바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역경은 주류보다 비주류에게 더욱 가혹하다. 비주류는, 일상과도 같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재구성되는 ‘흔치 않은’ 일에 더욱 환호하고 지지를 보낸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굳건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여성 청소년이 현실과 맞닥뜨리는 '야구소녀’ 이야기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포스터에 적힌 ‘던져봐! 그 벽이 깨지도록!’이라는 직관적 캐치프레이즈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 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맛본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영화의 주인공이자 타이틀 롤인 야구소녀 주수인(이주영)은 촉망 받는 여성 야구선수다. 다만 졸업 시점이 다가오며 그는 ‘여성의 프로 입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의 벽에 직면하게 된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좌절 끝에 자신 만의 강점을 내세워 세상에 당당한 직구를 내던진다. 이 과정에서 영화에는 몇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이 만들어진다.  수인은 이 학교의 단 하나뿐인 여성 야구부원이다. 옷을 갈아입을 곳조차 마땅치 않아 로커룸 대신 화장실 한 칸을 자신의 로커룸으로 이용한다. ‘여자치고는 빠른’ 시속 130km의 강속구를 던지지만, 남자들이 주류인 프로의 세계에선 한 마디로 게임도 안되는 그저그런 수준에 불과하다. 

‘여자치고 잘하는 선수’가 아닌 당당한 프로선수를 꿈꾸는 수인에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수인의 엄마 해숙(염혜란)은 현실을 직시하라며 공장에서 일하라 일갈하고 수인의 코치 최진태(이준혁)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며 다른 진로를 제시한다.

맥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수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취업을 강요하는 해숙에게는 “엄마가 원하는 것을 해줄 테니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 하겠다”고 대꾸하고, “나처럼 프로팀에 못 가면 어떡하냐”며 세상과의 타협을 권하는 최코치에게는 “내가 대신 가줄게요”라고 당당히 응수한다.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수인의 도전과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그의 성장에는 짜릿한 쾌감이 있다.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한계를 돌파하는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수인의 모습은 극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비주류에 속하는 주인공이 직관적인 욕망에 기인해 주류의 삶을 갈구하는 모습은 현실 속 유리천장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여성들과 닮아있다. 어린 여성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 이야기는 더 나아가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면을 그려내는 듯하다.

다만 이 영화는 성장의 주체를 여성으로만 한정 짓지는 않는다. ‘야구소녀’ 속 인물들은 모두 마이너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야구선수 꿈을 저버리고 교사의 길을 택한 김선생(이채은)과 프로선수의 꿈 앞에서 좌절을 맛보고 고교야구 코치로 전향한 최진태, 가장 노릇을 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수인의 아빠 귀남(송영규), 꿈을 좇는 딸 앞에서 현실의 냉혹함을 들이미는 수인의 엄마 해숙, 아이돌의 꿈을 꾸다 좌절한 친구 한방글(주해은).

현실의 냉혹함을 맛본 이들은 여자임에도 프로야구선수를 꿈꾸는 수인을 만류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주려 하지만, 그럼에도 수인은 꺾이지 않는다.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사진. 싸이더스 제공

자신의 꿈을 위해 한 발씩 내딛는 수인의 행동은 주변인을 감화시킨다. 맹목적일 정도로 야구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주수인의 발걸음은 비주류 인생을 살아가는 타인에게 또 다른 용기를 심어준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성장 이야기일 뿐 아니라 비주류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의 성장 이야기다.

영화 속 주수인은 끊임없이 “왜 안 되는 건데요?”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실행한다. 안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끈질기게 부딪히고 또 쟁취해낸다. 주수인으로부터 나온 작은 변화는 새로운 주수인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주수인에게 힘을 준다.

주수인과 ‘야구소녀’가 일으키는 작은 변화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크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미디어SR에 “성장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며 “주수인뿐 아니라 모두가 성장하는 이야기에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때때로 작은 변화가 큰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이 영화로 또 다른 주수인이 끝없이 등장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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