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변화, 많은 생각하게 만들어"

배우 박해수. 사진. 넷플릭스 제공

[미디어SR 김예슬 기자]

‘사냥의 시간’에서 한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하다. 한은 준석(이제훈)의 무리가 마주하는 직접적인 공포이자 절대적 존재 그리고 이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극에서 뚜렷한 목적성 없이 그저 재미로 인간 사냥에 나서는 한을 표현하기 위해 박해수는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한을 그려낸 그의 연기내공은 ‘사냥의 시간’의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백미다. 한을 통해 다시금 발견한 박해수의 저력은 역시나 반가울 수밖에 없다. ‘사냥의 시간’으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에 선 박해수를 만났다.

Q. 한은 뚜렷한 이유 없이 오로지 쫓는 것만이 목적인 인물이에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한의 목적성을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궁금해요.
박해수:
초반에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를 참고하려 했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안톤 시거와 한이 가진 동기와 목적은 전혀 달라서, 촬영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떤 참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감독님과 ‘사냥의 시간’ 속의 한을 만들고자 노력했죠.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잖아요. 그의 동기나 이유를 궁금해 하실 것 같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순간 공포감이 줄어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Q.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지만 작품 요소요소마다 한의 전사가 일부 드러나 있기도 했어요. 사냥 대상의 귀를 모아둔다거나, 총기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고, 고요한 곳에 있는 모습이 한의 서사를 약간이나마 짐작하게끔 했죠.
박해수:
한의 전사는 함축적이에요. 한의 오른쪽 팔과 방 안의 귀가 그 전사인데, 해외 특수부대 출신이어서 총을 능숙하게 사용하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특수부대 요원에겐 삶과 죽음뿐이잖아요. 살아있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생각해봤죠. 그래서 준석을 만나고 그를 죽이는 게 그의 삶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오면 안 됐기 때문에 함축적으로 정당성을 찾고자 노력했죠. 철저히 한의 입장에서요.

배우 박해수. 사진. 넷플릭스 제공

Q. 한은 희미한 미소 정도만 지을 뿐 표정이 거의 없는 캐릭터예요. 그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없었나요.
박해수:
정당성을 찾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영화에서 미스터리하게 비춰져도 배우는 캐릭터를 파악하고 준비를 확실히 해야 하잖아요. 나름대로 신체적, 심리적으로 변화를 시켜야 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스스로를 절제하고 옥죄며 고독하게 혼자 구석에 있으려 했죠. 심리적으로는 저들을 쫓아야 하는 이유와 그들을 죽여서 내가 얻는 것을 생각했고, 나만이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있고 나는 재판관의 위치에 있다는 작은 원칙을 갖고 접근했어요. 그리고 한은 말보다 행동 위주고 누군가와 소통하는 인물이 아닌 만큼 표정과 대사도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Q. 극에서 한은 분명한 포식자의 위치임에도 준석의 무리들에 존대를 하죠. 상대를 높이는 표현임에도 오히려 공포감과 서늘함이 배가 된다고 느껴졌어요.
박해수: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존댓말을 쓴 것 같아요.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존대를 사용하면 더 무서운 경우가 있죠. 한도 준석의 무리를 아주 작은 존재라 생각해서 존중의 의미가 아닌 존대를 사용한 게 아닌가 싶어요. 어찌 보면 인격으로 쳐주지도 않는, 하대보다도 더 무서운 존대인 거죠. 이걸 통해 무작정 사이코 같은 느낌보다 ‘품격 있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어요. 감독님과도 한이 품위 있고 젠틀한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Q. ‘사냥의 시간’은 충무로를 이끄는 젊은 피들이 뭉쳐서 더욱 화제가 됐어요.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박해수:
꼭 그 친구들과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역시나 멋진 배우들이더라고요. 현장에서 느낀 존재감이 더욱 컸어요. 뛰지 않아도 열이 날 정도의 에너지로 연기를 했는데, 이제훈과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등 네 배우들은 이미 그 캐릭터로서 존재하고 있더라고요. 돕고 돕는 게 아닌 하나의 덩어리 같았어요. 그 네 배우와 함께 한 것에 자부심을 느껴요.

배우 박해수. 사진. 넷플릭스 제공

Q. 근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다루는 세계관도 큰 관심을 받았어요.
박해수:
감독님은 근 미래지만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세트들을 준비하려 하셨대요. 사실 근 미래라는 말이 참 애매하잖아요. 그런데도 현장에 가 보니 감독님이 생각하신 대로 구현이 돼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 덕분에 배우들이 훨씬 더 적응하기 수월했죠. 근 미래 세계관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공간미술팀과 소품팀 분들이 정말 훌륭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현장에 가면 모니터석이 아닌 공간 속에 있는 게 더욱 편했을 정도예요.

Q. ‘사냥의 시간’은 공간 구현 등 시각적인 면 외에도 청각적인 부분에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에요. 극장 개봉에 최적화된 작품인데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게 됐죠.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고요.
박해수:
시국이 시국이었던 만큼 미뤄지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생각했어요. 기다려주신 관객 분들에겐 죄송했지만 넷플릭스로 관객 분들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복 받았다고 느껴요. 지금에 와서는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상황이 더욱 나아져서 영화 산업이나 공연 산업, 자영업 분야가 정상화되길 바라고 있어요.

Q.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리뷰도 나왔어요. 모니터가 아닌 스크린으로 봤다면 평가가 달라질 여지도 있어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아요.
박해수:
특성의 차이 같아요. 넷플릭스는 내가 가장 편한 상황에서 보는 건데, 스크린은 내가 직접 찾아가는 의지가 있고, 그 옆에는 같이 집중하는 관객들이 있잖아요. 연극과도 비슷해요. 표를 끊어 찾아가는 수고를 들여서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평가에 있어서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이젠 변화하는 시점이 된 것 같아요. 그 시작점이 ‘사냥의 시간’이지 않을까 싶고요. 

배우 박해수. 사진. 넷플릭스 제공

Q. 넷플릭스와 같은 전 세계적 OTT와 극장, 두 플랫폼 모두 장·단점이 확실히 갈려요.
박해수:
어떤 부분에서는 관객들에 감동을 줬다면 또 다른 부분에선 더 많은 나라의 시청자들에게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살리고 부각시킬 수 있다는 방향성이 생긴 거죠. 그런 면에서는 더 큰 가치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곧 변화의 시작인 거고요. 가치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좋은 시스템에서 볼 수 있으면 그게 곧 좋은 기회가 되는 거라 생각해요. 모든 것에 명암은 갈리고 장단도 있으니까요. 저도 늘 고민이 많아요. 플랫폼의 시대가 오면서 연극도 이제는 녹화해서 방영하는 시점이 도래했거든요. 영화인이자 예술인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죠. ‘사냥의 시간’ 외에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생길 것 같아요.

Q.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기점으로 ‘페르소나’, ‘양자물리학’ 등의 작품을 통해 점점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어요. ‘사냥의 시간’의 한도 연기세계 확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걸까요.
박해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여러 가지에 도전한 건 아니에요. 주어진 작품과 세계관에 빠져 들다보니 여러 장르를 하게 됐죠. 조금씩 방향이 달라지면서 스펙트럼도 넓어진다고 봐 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사냥의 시간’은 청년들의 감정 상태가 여러 갈래로 드러난 것에서 호기심을 느꼈어요. 외로움과 죄책감, 의리, 우정이 뭉쳐서 갈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매력적이었거든요. 그 중에서 한은 이유 없이 공포를 느끼게 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게다가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님의 작품이니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질지 더 기대됐죠. 게다가 ‘슬기로운 감빵생활’ 전에 연극을 하던 시기에 제안을 받은 작품인데, 세상에 제 존재가 불분명할 때 제게 손을 내밀어주신 만큼 더욱 감사히 임하게 됐어요.

배우 박해수. 사진. 넷플릭스 제공

Q. 한을 연기한 입장에서는 한이 어떤 공포감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박해수: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자체는 잘못이 없잖아요. 어두울 뿐인데 공포감이 느껴졌던 거죠. 영화 ‘죠스’도 마찬가지로, 상어는 그냥 사람을 먹어야 살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사자 같은 동물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갈래 생각만 갖고 사는 건데,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거예요. 저는 한이 그런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옥죄어오는 어둠 같은 존재이자, 영화 속에서 청년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공포. 그게 곧 한이라 생각해요.

Q. 여러 의견이 나오지만, 분명한 건 ‘사냥의 시간’이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이라는 점이에요. 전 세계에 공개된 만큼 특히나 얻고 싶은 반응이 있을까요?
박해수:
한국영화에서 ‘블레이드 러너’처럼 단순하고 직선적인 작품은 많지 않았어요. ‘사냥의 시간’은 내러티브보다는 서스펜스만 향해 달려가는 영화이면서도 배경은 근 미래예요. 외국 분들은 동양에서 그려낸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요. 그들에겐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훔쳐보는 게 되니까요. 그러면서 젊은 세대의 방황에 대해서는 공감할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커요. 코로나 때문에 베를린 영화제 이후로 세계 영화제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데, 몇 년 후에라도 저희 작품을 불러주신다면 꼭 가고 싶어요(웃음).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