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이익을 내야하는 기업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회’를 거론하며 책임을 지라고 하면 얼마나 막연하고 답답할까. 많은 직원을 고용해 이익 더 내면 바랄게 뭐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겠다. 더구나 그렇게 만든 이익을 주주와 임직원에 나눠주거나 재투자하고, 일자리 창출이란 시대적 과제도 충실히 수행하는데.

우리는 지금 이런 당연해보이는 얘기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않은 시대에 살고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실천하지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한다. 전세계 시장을 무대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있는 대기업들은 어떤 나라에 가면 ‘CSR에 얼마의 비용을 써야한다’는 법적 규제까지 받고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우리 기업들에게 CSR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상당하다. 회사원들 입장에선 당장 오늘 하루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데 허덕인다. 1개월, 1년으로 시야를 넓히면 경영실적 부담을 피할 수 없고, 거기에 진짜 ‘책임을 져야할’ 순간도 다가온다. 기업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임직원이 그 안에서 생존하려면 피할 수 없는게 책임이다.

이런 임직원을 품고있는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이 주어지는 건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두해 버티다 사라질 기업이 아니라면 말이다. 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우리가 발딛고있는 지구가 건강해야하고, 사회가 건강해야한다. 지구가 기후변화로 중병을 앓는다면, 사회가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무너진다면 기업은 결코 지속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환경과 사회를 지키는 의무가 경제활동의 주체인 기업에게 주어진다. 시장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쏟는 것처럼, 사회를 지켜내는 것도 정부나 국제기구가 아니라 바로 기업의 몫이란 얘기다. 이게 법으로 인격을 부여받은 ‘법인’으로서 기업이 태생적으로 안고있는 책임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세계적으로 CSR 활동에 소홀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고있다는 사실이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설득이란 강제력을 쓰지않고 상대방을 내가 의도하는 방향도 움직이는 과정이다. 흔히 보상과 처벌이라는 양 극단의 방법이 쓰인다. 보상을 잘 해주는 편의 설득력이 크다고 알려져있지만 처벌이 가져다주는 공포심이 설득의 중요수단이 되는 경우도 많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활동을 잘 하면 경쟁에서 이긴다’고 선한 명제는 ‘사회적 책임활동을 제대로 하지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을 겪고 생존을 위협받는다’는 현실의 다른 표현이다. 세계 각국이 CSR 활동과 관련한 직간접 규제를 양산하고있는게 그 증거다.

이런 추세를 절감한 탓에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들을 물론, 우리나라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활동에 대해 매우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코스리가 실시한 ‘한국기업 CSR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기업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65.5%), 사회공헌활동(56.4%), 지속가능경영(27.3%), 사회책임경영(14.5%), 윤리경영(7.3%)등의 이름으로 유사한 일을 하고있다. 설문대상이 대기업인 탓도 있겠지만 전체 응답기업의 84%가 현재 CSR 전략을 수립해 운영하고있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기업평판을 높이고’, ‘우수직원을 확보하고’, ‘리스크관리를 잘 하려는’ 등 다양했다. 물론 CSR과 관련한 상설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건 대부분 3년이내의 일이다. 이제 달라지려 몸부림친다는 뜻이다.

이제 CSR을 숙명처럼 여기는 기업이 늘고있다. 기업규모가 클수록,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갈수록 CSR에 적극적이고, 홍보도 열심이다. 관련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사내 유력임원을 앉히는 추세가 강해지고있다. 일반인에게 아직 CSR이 익숙치않는 용어인데다 경영의 부속물, 혹은 곁가지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탓에 현실이 녹록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외 기업들이 CSR이란 이름으로 요즘 하고있는 일, 앞으로 할 일을 들여다보면 변화의 흐름을 알아챌 수 있다.

우선 공급사슬(Supply Chain)을 보자. 대기업은 흔히 협력업체로 지칭되는 공급사슬을 국내외 어디에서나 매우 폭넓게 거느리고있다. 2차, 3차 협력업체를 포괄하면 대기업 하나당 수백, 수천개의 공급사슬이 형성된다. 특히 전후방 연관효과가 큰 자동차 산업은 전세계에서 원료와 부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공급사슬의 정점에 있다.

공급사슬과 관련해 자동차업체들은 원료에 투입되는 광물자원 가운데 일부를 콩고·수단·르완다·부룬디 등 분쟁지역에서 조달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광물의 판매자금이 반군으로 유입되고, 분쟁광물 채취 과정에서 인권유린, 아동노동력 착취, 성폭행 등 사회적 문제가 커지자 국제사회는 지난해 8월부터 이 지역 광물의 생산 및 불법 유통을 금지하고있다. `탄탈룸`이나 주석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상장기업이 오는 5월부터 분쟁광물 사용여부를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있다.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미국기업과 거래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누구도 이 규제를 피할 수 없다. 협력업체의 건전한 노동관행과 폐기물 감축노력에 대해 대기업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건 상식이 되고있다. 이와 관련한 법적 규제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회적 책임 활동을 전개하는 기업들은 자기 분야에서 길을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업경영활동 자체가 사회적 책임활동과 혼재돼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생산부터 판매, 소비자와 관계까지 전체적인 과정에서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있다.

미국 내 통신업계 3위인 스프린트(Sprint)는 휴대전화 재활용분야에선 미국 1위다. 지난해 9월 1주간 휴대폰 재활용 규모가 10만3582대에 달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스프린트는 자사의 환매 프로그램(Sprint Buyback Program)을 통해 고객이 사용한 휴대폰을 최대 300달러까지 주고 되산다. 세계최대 유통업체 월마트(Walmart)는 미국내 215개 지역 점포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 89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2만2250개 가정에 전기를 제공하고도 남는 양이다. 아웃도어업체 파타고니아(Patagonia) 지난해 9월 ‘친환경 평상복 순환 파트너십’(Common Threads Partnership)의 일환으로 ‘옷 오래입기’(Worn Wear) 캠페인을 시작했다. ’반드시 필요한 물건만 사며, 산 물건은 수선하고, 재사용하고, 재순환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아주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회적 책임 활동은 기업이 당면한 발등의 불이다. 협력사들은 대기업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책임 활동의 공동주역이다. 지역주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기업이 뿌리내리고있는 지역의 수많은 주민들은 사회적 책임활동의 수혜자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책임활동을 함께 전개하는 동반자들이다. 주주들은 더 말할것도 없다. 주주들은 최우선적 이해관계자로 기업이 제대로 책임을 이행하는지 감시하고, 격려해주는 든든한 후원군이다.

그러나 CSR 실천에서 핵심역할은 역시 기업 직원들의 몫이다. 기업이란 법인은 큰 그림을 그릴뿐이고 실제 CSR 프로그램을 현실로 옮기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이 시키는 일, 그런 한계에 머무는 CSR 실천활동만 해서는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기업과 일체감을 갖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책임을 실천해야 사회와 환경을 지켜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보다 체계적으로 기업내에서 공감대를 확산하는 노력이 있어야한다. 사내에 사회공헌팀, 윤리경영팀, 사회책임팀, 지속경영팀 등 어떤 이름으로든 조직을 만들고 거기서 기업경영 전반에 녹여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직원은 물론, 주주와 지역주민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면 더욱 좋다. 그런 공감대 위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탄생하고 성장한다.
<코스리 손동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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