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 사진=구혜정 기자

차좀비. 큰 인기를 모은 tvN 토일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극본 송재정·연출 안길호)을 본 사람이라면 ‘차좀비’라는 말을 들을 때 반가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처음엔 무섭기만 하던 그의 등장은 점점 익숙함을 입고 친근함과 약간의 안쓰러움까지 느끼게 했다. 매일 죽는 남자. 똑같은 옷과, 똑같은 분장을 하고 똑같은 인물에게 똑같이 죽는다. 그동안의 드라마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신개념 캐릭터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차형석 역을 맡은 배우 박훈을 최근 만났다. 극 중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옷을 입고 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 옷을 입고 올 걸 그랬네요”라며 웃음 짓는 박훈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웠다. 날카로운 얼굴 속 짙은 눈빛에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박훈은, 분명 매력적인 배우다.

Q. 새로운 옷이네요(웃음).
박훈: 그 옷을 입고 올 걸 그랬네요(웃음). 그 검도 집에 있거든요. 감독님이 기념으로 주셔서 잘 간직하고 있어요.

Q. 고생 많았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박훈: 아쉬움이 컸어요. 뭔가를 끝내면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편인데 이 작품은 아쉽기만 하더라고요. 사전제작으로 진행됐고 해외 촬영분도 많아서 사람들과 함께 지낸 시간도 길었거든요. 그래서 많이 친해졌던 만큼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제가 더 잘하고 신경 썼어야 한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Q. 어떤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이었나요.
박훈: 스태프, 배우들과 많이 대화하고 싶었거든요. 사전제작이었던 ‘태양의 후예’는 데뷔작이라 다른 사람이 볼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형과 오빠가 된 입장에서 제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을 해주고 싶었죠. 그렇다 보니 마음에 부채의식이 남았어요. 선후배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고 싶어서 애썼던 기억이 커요.

박훈 / 사진=구혜정 기자

Q. 이번 작품에서의 역할은 독특했죠. 빨리 죽기도 하고 대사도 거의 없어요. 표정으로만 연기하죠. 출연을 결정짓기에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박훈: 주변에서도 아쉽지 않냐는 말이 많았어요. 출연 전 4부까지 대본을 받았는데 3부에 죽길래 벌써 죽나 싶어 놀랐죠(웃음). 하지만 연극을 하면서 말하지 않고도 의미를 전달하는 작업을 많이 했었거든요. 대사를 추가하기보다는 그걸 과감히 생략하고 거기서 나오는 중의적 의미를 주는 일들을 해왔던 만큼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현빈 씨와 교류가 주로 이어져서 그것만으로도 많은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죠. 거기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음악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전달됐어요.

Q.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만큼 ‘차좀비’라는 애칭도 생겼어요.
박훈: 감독님이 어느 날 “사람들이 너보고 좀비래”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애칭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캐릭터가 될 줄은 몰랐어요. 사실 저는 제 캐릭터가 웃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무섭다는 반응이 많아서 놀랐었어요.

Q. 무섭다는 반응이 가장 크게 나왔던 게 현빈 씨와 샤워부스에서 대치하던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박훈: 그 지점을 연기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어떤 정서는 흘려줘야 하죠. 저는 NPC로 나와도 현빈 씨에겐 데미지가 계속 쌓이고 그 과정에서 정서도 계속 이어지죠.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표현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NPC처럼 있어야 할지, 유기체로서 정서를 보여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하지만 반복되는 죽음이 시청자에게 누적되면서 정서가 어느 정도는 표현되어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빈 씨와의 서사는 중요했죠. 그것만 된다면 이 캐릭터는 대사가 있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거든요.

박훈 / 사진=구혜정 기자

Q. 흔치 않은 게임 소재 드라마인 만큼 이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박훈: 부담감은 나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안정을 추구하고 새로움을 두려워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러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편견 없이 대본을 보려 하고, 도전하려 하죠. 아직, 저는 많이 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무너져 보기도 해야 나중에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요? 아직까진 오기가 더 생기는 것 같아서, 두려워도 도전적인 선택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Q. 도전하려는 마인드가 인상적이네요.
박훈: 작품에 대해서는 도전을 하려고 해요. 시청자 혹은 관객분들의 상상력이 더 풍부한 만큼 창작자로서 그걸 못 따라가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많아요. 더 좋은 콘텐츠를 내놓고도 싶고 타성에 젖고 싶지도 않아요. 누군가가 계속 실패해야 도전할 여지가 생기고, 그 도전이 더러는 성공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새로운 건 창작자의 의무 같아요. 배우는 철들지 말아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씀에 많이 공감해요.

Q. 그런 의미에서 차형석 역할은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해요. 인물은 하나지만 캐릭터는 현실의 차형석과 게임 속 차형석, 두 캐릭터였죠.
박훈: 작가님의 대본 특성상 결과가 먼저 나오고 과정이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캐릭터를 잡을 때 쉽지만은 않았어요. 나쁜 사람이라는 정보밖에 없어서 그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뿐이었죠. 하지만 시청자분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해주셔서 놀랐어요. 진우(현빈)를 괴롭혀서 형석이를 미워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도 많이 이해해주시고 불쌍하게 생각해주셔서 연기하는 배우로서는 쾌감이 있었어요. 입체적인 인물이 되는 거잖아요. 착하지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만도 않고. 결국은 현실적인 거거든요. 무조건적으로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없잖아요.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했느냐를 봐야하죠. 그런 면에서 저는 차형석을, 그냥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박훈 / 사진=구혜정 기자

Q.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던 캐릭터 같아요. 여러 면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매번 똑같은 분장을 하고 매번 죽는 연기를 하죠. 무엇보다도 CG 연기도 많아요.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박훈: CG 연기가 처음엔 정말 민망했어요(웃음). ‘비밀의 숲’의 안길호 감독님과 ‘W’의 송재정 작가님이 만나신 작품이잖아요. 가장 사실적인 사람과 가장 판타지적인 사람이 만나서 제가 어느 장단에 놀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시너지가 있었죠. 진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오히려 더 판타지처럼 보일 것 같아서 CG장면은 더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애썼어요.

Q. 그 덕분에 정말 실감 나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죠.
박훈: 저는, 저희 작품이 분명히 다른 작품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완성도 있는 CG를 구현해줬으니까 더 이상 사람들은 CG 영역에 관대해지지 않을 거니까요. 저희 스태프들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 장면을 구현해줘서 굉장히 감사해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되는 게 신선했고요, 이 작품을 계기로 더 많은 상상력을 발현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감사해하며 만족하고 있어요.

Q. 차기작은 이번 작품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사극입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박훈: 사극은 다른 의미의 판타지 같아요. 저희가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니까요. ‘해치’라는 작품을 열심히 촬영 중인데, 거기서는 일찍 죽거나 하는 역할이 아니어서 말도 많이 하고 있어요(웃음). 전작과 다른 질감의 역할이 나온 것 같아서 좋아요. 재밌고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정갈한 모습을 보였드렸다면, ‘해치’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이에요. 완전하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않은.

Q. 새로운 도전이겠군요.
박훈: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보여드려야 하는 건 배우의 당연한 의무 같아요. 저도 계속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망가지는 역할도 정말 하고 싶어요.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훈 / 사진=구혜정 기자

Q. 여러 모습을 보였다는 면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남다른 의미로 남았을 것 같아요.
박훈: 많은 응원과 관심, 사랑 혹은 질책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밝은 면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저는 질책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발전에 도움이 되니깐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준 만큼 올 한해도 가장 저답게 해나가고 싶어요. 그런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게 제 의무기도 하고요. 관심보다는 질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나은 연기를 위해 그런 시간을 잘 감수해서 단단한 배우로서 많은 분들게 신뢰감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Q.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박훈 배우에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박훈: 음, ‘사람들’이에요. 가장 중요한 말일 수 있는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태프들의 작품이에요. 제가 나오면 분장 스태프들은 피 연결을 다 맞춰야 하고요, 의상 스태프들은 같은 옷을 여러 벌 준비해야 했고요, CG팀은 CG를 해야 했고 음악 팀은 음악을 깔아야 했어요. 현장 스태프들은 제가 넘어질 때마다 피를 닦아야 했고 조명팀은 천둥을 쳐야 했어요. 그 짧은 죽는 장면을 위해, 저 때문에 스태프들은 두세시간을 노력해야 했죠.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그 어떤 작품보다 스태프들의 열정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밝은 면은 모두 스태프들에게 돌리고 싶고요.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게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요. 거기에 현빈, 박신혜 같은 끝내주는 배우들과 함께 해서 고맙고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제 삶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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