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이근필옹(1932~2024).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이근필옹(1932~2024).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종택을 지켜온 종손 이근필(李根必) 옹이 지난 7일 93세로 별세(1932~2024)했다. 퇴계 종가 주인의 부음은 많은 이들을 슬프게 했다. 각계각층에서 조문을 왔고 조화를 보내왔다. 11일의 발인에는 유족과 친지, 유림 등에서 100여 명이 장례 행사에 참여해 퇴계 종택 근처 선영에 마련된 묘소까지 호송을 하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전국 유림에서 보내온 만장(輓章)이 가는 길을 덮었다. 

퇴계 종손 영결(2024년 3월 11일).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의 영결(2024년 3월 11일)..

종손의 타계로 퇴계종가를 지켜온 그의 생애가 재조명되었다. 퇴계의 16대 종손으로서 일찍이 사범대학을 나와 인천의 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다가 퇴계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온혜초등학교 교장을 맡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교육에 매진했고, 그 후 30여 년간 종택을 지켜왔다. 이근필 종손은 종택의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에서 손님을 맞으면서 늘 무릎을 꿇고 앉아 손님의 말을 경청하였다. 손님이 퇴계에 대해 물어볼 때만 선조의 삶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 사상을 오늘에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를 삶에서 실천해 왔다.

근필 종손이 지켜온 퇴계종택은 어떤 곳인가? 퇴계가 낳고 자란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 본가에서 동쪽으로 4km쯤 떨어진 이곳은 토계(兎溪)라는 이름의 작은 냇물이 흐르던 곳이었는데 1550년 퇴계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퇴계(退溪)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고, 30분을 걸으면 되는 거리에 도산서당을 지어 그곳에서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을 더욱 연마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동방의 대학자요 스승인 퇴계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대문 안에 들어서서 본 퇴계종택의 모습.
 대문 안에 들어서서 본 퇴계종택의 모습.

퇴계의 학문과 사상은 이 집을 통해 근세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모태가 되기도 했으니 1894년 안동에서 의병활동이 시작되고 1896년 초 예안 일대에서도 선성의진(宣城義陣)이라는 의병이 퇴계 종택을 출발점으로 해서 일어났다. 일본군이 가장 먼저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태웠고, 다시 퇴계의 형님 댁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의 종택으로 의병운동이 이어지자 석 달 후 온계 종택도 불을 질러 그 정신을 말살하려 했다.

안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발상지로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국민회의 의장인 일송 김동삼 선생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363명의 독립유공자가 안동에서 나왔다. 그중에서도 퇴계의 집안인 진성이씨 문중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와 순국자를 배출한 것도 퇴계의 가르침 영향이었다.

근필 종손은 스스로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통해 퇴계가 밝혀준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알려왔다. 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천 근(斤)의 무게가 되었다. 그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복은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복은 결국 자신이 짓는 것"이라며 '스스로 복을 짓자'는 '조복(造福)'을 강조했다. 또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기뼈하고, 잘하는 것을 알리는 삶이 결국 자신의 복을 짓는 것"이라며 '은악양선'(隱惡揚善)을 권했다. 유교의 경전인 《중용(中庸)》 6장에 나오는 말이다.

퇴계의 친필을 모아서 만든 '은악양선' 부채
퇴계의 친필을 모아서 만든 '은악양선' 부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실 것이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시되, 악(惡)을 숨겨주고 선(善)을 드러내시며, 두 끝을 잡고 헤아려 그 중(中)을 취한 뒤에 백성에게 쓰셨으니, 이 때문에 순임금이 되신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성인으로 평가받는 순임금이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은악양선을 했기 때문이고 이 세상을 이끄는 요체, 정치의 핵심이 바로 은악양선이라고 공자가 말한 것이다. 근필 종손은 이 가르침에 따라 남의 나쁜 점은 덮어주고, 남의 좋은 점은 널리 알려야 참된 세상이 온다는 것을 늘 말하고 이를 실천해 왔다.

2001년 11월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설립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근필 종손은 매번 수련생들에게 퇴계의 정신과 참 삶의 방법을 강의하였고, 마침내 2022년 1월에 수련생이 10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퇴계의 삶을 배우고 돌아가서는 일상에서 실천하는 큰 역사를 만들어 왔다.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내 삶을 깨우친다'는 종택 대문의 글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내 삶을 깨우친다'는 종택 대문의 글귀

우리나라는 선비의 나라라고 말한다. 선비는 학문과 인격수양을 통해 스스로의 삶에 모범을 보이며 올바른 도덕규범들을 사회 속에서 구현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높은 벼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이 중요했다. 근필 종손은 종택의 대문에 ‘봉천리 계오생(奉天理 啓吾生)’이라는 글귀를 써 붙이고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나의 삶을 깨우친다"는 글 뜻 그대로를 평생 실천해왔다. 그것이 바로 선비의 삶인 것이다.

퇴계가의 종손이기에 수백 년 유가의 예법을 지켜오면서도 종가문화 개선에 나서 2011년 '문중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종손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2014년에는 퇴계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현대사회에 맞게 초저녁 제사로 지내면서 전국 불천위 종가들의 제례문화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명절 때 간소한 제수를 차림으로써 제사가 번잡해지는 폐단을 막아주었다. 과거 서원 사당에 여성 출입을 금하던 폐습을 없애고, 2020년 서원 역사 600여 년 최초로 도산서원 향사에 여성을 초헌관으로 허용하는 등 세상 모든 인간을 존중하는 삶을 실천해 왔다. 종손의 말 한마디, 그의 선택은 그것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전해져 우리들의 전통적인 인습이나 삶을 바꾸는 작은 지침의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근필 종손이 선조인 퇴계의 가르침을 받아 평생 검소하면서도 참된 선비의 삶을 지켜온 데 따른 선한 반향이었다고 하겠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으면서 늘 가까이에서 종손의 삶을 지켜본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지위가 높은 사람, 학식이 있는 사람,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종손처럼 생각과 말씀,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실천하는 분은 처음이었어요. 진정 ‘훌륭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런 분이셨지요”라고 말한다.

근필 종손을 보내면서 생각해본다. 우리나라는 조선왕조를 통해 유학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자 종교로 생각했고 그것으로 전국에 수많은 서원들이 생기고 각지에 종가가 형성돼 이 종가문화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다. 시대가 바뀌어 그런 문화가 과거로 들어가 버리는 요즈음, 유학이 가르치고 종가문화가 지향하던 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동안 우리의 학교에서나 대학에서 퇴계를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들은 많고 그에 관한 저술도 수없이 많지만 퇴계의 삶이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지 못한 것은, 입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삶을 통해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퇴계종택 앞에 선 필자.
퇴계종택 앞에 선 필자.

전국에 서원이 있고 종가가 있지만 퇴계라는 정신적인 스승의 직계 후손에게는 다른 어느 종가에 비교할 수 없는 무형의 권위가 있었고 깨우침이 있었다. 그러기에 퇴계종가 근필 종손의 서세는 우리나라 유학의 종장(宗匠)인 퇴계를 통해 이어온 종가문화, 선비문화의 퇴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누군가가 이런 삶의 모범을 다시 보여주고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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